수필 같은 생애 … 세상 '인연'을 접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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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피천득옹(左)과 전문의인 아들 수영씨가 동네 꼬마 류태우군을 안고 밝게 웃고 있다. [중앙포토]

금아(琴兒) 피천득. 그는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늙지 않는 얼굴로 늘 우리 곁에 머무를 줄 알았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 멈추지 않을 줄 알았다. 지난해 9월에도 '피천득 수필집' 일본어판을 제작한 일본 출판사 제작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금아였다.

그러나 지인들은 달랐다. 조용히 '만약'을 준비해왔다. 금아는 96번째 생일이었던 지난해, 예년과 달리 지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외부와 연락도 끊었다. 금아는 변변한 세간도 없는 서울 반포동 32평 아파트에서 25년을 살았다. 거기서 금아는 치매에 걸린 아흔 살 아내와 막내딸 서영(61)씨가 어릴 적 갖고 놀던 인형과 함께 살았다. 아흔여섯 평생을 자신의 수필처럼 소박하고 단아하게 살다 간 금아였다.

#거문고 소년

금아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열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금아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엄마'라고 불렀고, 당신을 기린 수필 '엄마'를 남겼다. 어머니 말고 소년 피천득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 두 명이 더 있다. 금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현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그때 그의 재능을 주목한 이가 춘원 이광수였다. 춘원은 금아의 중국 유학을 권했고, 유학을 마친 금아는 춘원의 집에서 3년간 기숙하기도 했다. 거문고 소년이란 뜻의 아호 금아도 춘원이 지어준 것이다. 거문고 잘 탔던 금아 어머니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금아는 도산 안창호를 만난다. 도산도 금아를 몹시 아꼈다. 도산은 금아가 아프자 요양소에 입원시켰고 아침마다 문병했다. 도산과는 안타까운 일화도 있다. 도산이 순국했을 때 그는 조국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경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때 일을 금아는 평생의 한으로 짊어지고 살았다.

#서영이와 난영이

금아는 영원한 어린이였다. 늙어서도 늘 어린이의 표정을 짓고, 어린이를 '어린 벗'이라고 부르며 어린이처럼 살았다. '엄마! 나는 놀고 싶은데 무엇하러 어서 크라나'('아가의 슬픔'부분)라고 드러내놓고 어리광을 부렸다. 천생 어린이 같은 금아를 작가 최인호는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불렀다.

금아는 일생에 두 여성이 있었다. 엄마와 딸 서영이다. 금아는 외동딸을 끔찍이 위했다. 딸이 조금만 아파도 학교에 안 보냈고, "아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수필집 '인연'(1996년)의 세 장 중 한 장을 '서영이'라 이름 지어 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전했다. 거기서 금아는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라고 적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미 하버드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55년, 금아는 딸 선물로 인형을 사왔다. 그 인형을 금아는 여태 간직하고 있었다. 씻기고 이불 덮어 재우고, 철 따라 옷을 갈아입히며 쉰 해를 함께 살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딸 서영이를 대신한 사랑이었다. 인형의 이름은 난영이다.

# "사랑을 하고 갔구나"

금아는 채소 위주로 소식했다. 술.담배도 하지 않았다. 잘 알려진 금아의 장수비결이다. 이와 관련한 금아의 농(弄) 한 토막이 있다. "영국의 버나드 쇼(1950년 95세로 사망)가 채식주의자였어요. 나이 들어 죽었는데 이때 런던 타임스가 사설에서 '버나드 쇼의 장례 행렬에는 염소와 소, 양떼들이 울면서 뒤를 따랐다'고 썼대요. 재미있지?"

서양 신문처럼 적어본다. 그의 운구에도 소와 돼지가 울면서 뒤따를 것이고, 그의 주옥같은 문장을 읽으며 어른이 된 모두가 뒤이을 것이다. 언젠가 금아는 "잠자는 듯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이 가장 커다란 소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장 커다란 소망까지 이루고 떠났으니, 금아는 복도 많으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9일 오전 7시, 02-3010-2631.

손민호 기자

피천득 선생이 남긴 명구절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수필 '인연'에서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수필 '오월(五月)'에서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숲 속으로 난 고요한 길이다."-수필 '수필'에서

"눈보라 헤치며/날아와/눈 쌓이는 가지에/나래를 털고/그저 얼마동안/앉아있다가/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아득한 눈 속으로/사라져 가는/너" -시 '너', 생전의 금아가 가장 아꼈던 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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