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실 통폐합되면 250조원 쓰는 예산처 '감시 사각지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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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22일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에서 정부 각 부처의 브리핑룸과 기사 송고실을 권역별로 3개로 통폐합한다는 내용의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뉴시스]

"이곳에서 잠을 자다 적발되는 공무원은 사진을 찍어 공개하겠다."

정부 과천청사 공무원 접견실에 나붙은 경고문이다. 정부가 기자들로 하여금 공무원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취재하라고 만든 방이 낮잠 장소로 둔갑한 것이다. 취재 신청을 해도 대개 공무원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이 방을 이용하는 기자는 거의 없다. 정부의 '선진 취재 관행' 현장은 이렇게 방치돼 있다.

◆ 합동브리핑실은 '닭장'=과천의 5개 경제 부처 합동 브리핑실은 '닭장'으로 불린다. 3개의 브리핑실에다 두 곳의 기사 송고실이 있다. 송고실에는 좁은 책상이 기자당 하나씩 배정돼 있다. 기자들은 브리핑실과 송고실을 오가며 하루 종일 취재하고 기사를 보낸다.

정부의 이번 기자실 통폐합 조치로 닭장의 사정은 더 열악해진다. 현재 인원보다 훨씬 많은 기자가 새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따로 브리핑룸이 있던 복지부.노동부.과기부.건교부.환경부.예산처 등의 브리핑도 이곳으로 몰린다. 대신 브리핑룸은 단 한 개 늘어날 뿐이다. 정부가 다짐한 "브리핑을 충실히 하겠다"는 약속은 빗나간 지 오래다.

앞으로 국세청(종로구)과 예산처(서초구)는 언론이 접근하기 힘든 사각지대로 남게 된다. 과천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브리핑실마저 없어지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이재근 행정감시팀장은 "매년 250조원을 쓰고 걷는 예산처와 국세청이 언론과 유리된다면 국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보 공개를 확대한다는 정부의 다짐도 믿기 어렵다. 기자와 공무원의 접촉을 막기 위한 전자브리핑이 대표적이다. 이미 기자들에게 e-메일로 보내는 정부 부처의 브리핑 자료는 보도 가치가 거의 없는 스팸(쓰레기)메일로 가득 차 있다. 진짜 알아야 할 알맹이 정보는 공무원들만 독점하게 된다.

3월 23일 재경부 세제실에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재경부 홈페이지의 정보공개방에 실린 '상반기 조세연구원 현안 이슈 분석 수요 조사 결과'가 한 인터넷 언론에 보도됐기 때문이다. '선진국 중소기업의 판정 기준' '외국인 투자 조세 제도 현황'등 매우 기본적인 내용밖에 없었다. 그래도 재경부는 즉각 이 자료를 삭제했다. 이후 정보공개방에서 의미 있는 자료는 사라졌다.

◆ 막강한 권한.정보 집중된 경찰=경찰은 강력한 권력기관이다. 엄청난 인력과 권한 및 정보가 집중된다. 경찰 인력은 의경을 제외해도 9만5336명이다. 단일 부처로는 가장 많다.

전국에 235개 경찰서가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173만여 건의 범죄를 수사했다. 시중 루머부터 주요 부처의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관이 3000여 명이나 된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경찰을 제대로 감시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언론밖에 없는 실정이다. 동국대 곽대경(경찰행정학) 교수는 "다른 어떤 부처보다 언론의 감시 눈길이 필요한 곳이 경찰"이라고 지적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같은 강압 수사는 이제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태도가 여전하다는 게 국민의 시각이다. 경찰의 청렴도도 낮은 편이다. 지난해 국가청렴위원회의 조사에서 경찰청은 14개 청 단위 행정 부처 가운데 13위에 그쳤다.

사건의 축소나 은폐 시도가 여전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폭행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경찰은 사건 다음날 내용을 파악하고도 한 달 넘게 수사를 미뤘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다.

기자들이 시민의 인권을 옹호해 주는 경우가 많다. 10년 경력의 한 신문기자는 "2000년까지만 해도 일선 경찰서 강력계를 취재하다 보면 수사관이 피의자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고 말했다.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이창무 교수는 "경찰 기자실이 없어지면 밀착 취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우려했다.

윤창희.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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