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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 한계부닥친 한국 경제/현장에서 보고느낀 문제점(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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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부실한 기술력 불황때 큰 취약점/주도산업도 없어… 속도조절 필요
준거시적 산업론으로 봐도 현재 한국경제는 20년이상 계속된 급성장이 벽에 부닥치고 있다.
수출형산업 내지 잠재수출형 산업 가운데 비교적 호조인 것은 조선·철강·반도체 분야다. 이중에서 조선은 최근 미국이 환경보호 차원에서 유조선의 기름누출을 막기위한 선저 2중바닥장치를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호황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조선·철강산업이 앞으로도 한국의 다른 산업들을 이끌고 나가는 산업으로 클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산업은 라이벌 관계의 있는 일본 동종업계의 「특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업들은 세계 업계에서 여전히 기술적으로 「한계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경제가 호황일때는 이익을 낼 수 있지만,불황에 빠질 때는 수주대상에서 가장 먼저 제외되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이같은 약점은 반도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제 반도체는 미·일 반도체협정에 따라 판매하한가격이 정해져 있다. 그동안 한국산 반도체가 미국시장에서 마킷셰어를 크게 늘린 것은 이에 힘입은 바 크다.
현재 세계 가전·자동차업계는 재편이 진행되고 있다. 유럽공동체(EC)와 아시아에서도 시장통합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어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력·생산능력을 갖추지 못한 기업은 도산하거나 흡수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일본의 경우도 이 분야의 하위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상당히 고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한국의 가전·자동차산업이 앞으로 한국의 산업을 리드해 나가면서 세계 업계에서 살아 남으려면 상당한 고전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 최대의 현대자동차라고 해야 일본에서 하위 메이커인 스즈키(영목) 자동차 규모에 불과하다. 한국에는 안정된 국제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주도적 산업이 없으며 그같은 산업이 당장 나타나 관련 산업,더 나아가 경제 전체를 빠른 템포로 끌어올리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미시적으로 봐도 한국 기업들의 경영기법은 급성장을 지속하기엔 한계에 이르렀다. 품질향상을 통한 제품의 고급화로 고부가가치제품을 생산,판매할 국면에 와있으나 경영시스팀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기업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일본의 신제품을 어떻게 하면 남보다 빨리 똑같이 복제할까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단계일뿐 참다운 의미에서의 기술개발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품질관리도 소리는 요란하지만 제품 불량률을 일본 기업들 수준만큼 낮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한국은 사회전체의 효율이 극도로 낮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기업의 노력만으로 좀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예를 들어 납기를 정확히 지키는 제품메이커가 드물다. 때문에 완성품 메이커들이 아무리 원가절감을 하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
필자가 한국에 있을때 서울에서 한국 중소기업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부산에 출장중이던 필자는 강연약속에 대기위해 출장계획을 도중에 취소하고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으로 날아와 예정시간 직전 강연회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강연회장에는 출석하기로 돼있는 30명 가운데 단 3명이 와있을 뿐이었다. 강연이 시작된 것은 예정시간부터 30분이 지나서였다.
그날 강연제목은 「일본시장 공략법」으로 당초 일본 중소기업들의 품질향상 방법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었으나 필자 임의로 강연내용을 바꿔 버렸다. 『품질보다 우선 납기를 정확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국의 한 기업인이 필자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경제만이 돌출해서 발전하는 사회란 있을 수 없다.』
성장의 속도가 지나치면 나중엔 도리어 성장에 마이너스가 된다. 그 좋은 예가 최근 한국기업의 국제적 이미지 저하다. 한국의 가전산업이 VTR를 생산·수출하기 시작할 당시 과연 그에 걸맞은 실력이 있었을까.
과거 일본 자동차가 처음 미국시장에 진출했을때 고장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후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미국의 소비자들을 실험대상으로 품질개량을 거듭했다. 고장이 발생하면 이를 다시 제품에 피드백하는 과정을 거쳐 재발방지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국기업에는 이같은 「조직적 복원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성장의 한계」가 아니라 「급성장의 벽」이다. 또 안정성장을 권했을 뿐 「한국경제 비관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의 속도를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제안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한국은 비록 한국인 자신들의 기대만큼 빠른 속도는 아닐지 몰라도 나가는 방향만은 올바른 방향으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경영자들은 기술개발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정부도 공공투자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풍토 또한 한국인들의 안정지향성으로 보아 서서히 호전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일본의 실패 예를 지적해두고 싶다. 현재 일본 정부가 목표로 잡고 있는 성장률 3.5%에 대해서도 일부에선 너무 높다고 비판한다. 일본경제는 과도한 재테크 결과 깊은 병이 들어있다. 군소 금융기관 가운데는 경영위기에 빠지는 곳도 나타날 전망이다. 재테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제조업체 가운데서도 경영이 악화된 기업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매출액이 줄었다든지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쉽게 원상회복이 가능한 문제도 아니다. 지난 7월28일자 니혼게이자이(일본경제) 신문 1면 머리기사는 일본 사회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제조업의 사용 총자본회전율(매출액을 사용자본으로 나눈 것)이 1차 오일 쇼크후인 75년 이래 16년만에 처음으로 「1」이하로 떨어졌다는 기사다.
표면상 의미는 자산의 효율성이 악화됐다는 의미지만,이를 기업행동론 차원에서 보면 그동안 과도한 설비투자를 한 결과 자산까지 상처를 입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일본과 한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상황이 다르다. 한국경제는 아직 젊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성숙단계에 이른 일본처럼 성장목표를 낮게 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재무체질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본의 숫자를 기준으로 삼긴 어렵다. 그러나 자기의 잠재성장력을 잘못 판단하면 터무니없는 실패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영치고사 일본경제신문 국제부차장·전 서울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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