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입문 25년만에 금배지 한화갑(의원탐구: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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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대중대표의 「가신」/대학시절 첫 대면서 반해/정책·홍보 담당… 「동교동 연금시대」매일 출근
한화갑의원(민주·53)은 김대중대표와 인연을 맺은지 30년이 됐지만 화려한 무대와는 떨어져 주로 「동교동 2선」쪽에 서있었다. 나서지 않는 성격탓도 있지만 『고향후배의 처신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체념속에 살아왔다.
그는 80년 5·17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법정에 섰을때 최후진술에서 『고향선배곁을 지키는 것 때문에 수난을 받는다면 달게받겠다』고 했다.
그는 권노갑·김옥두의원과 함께 김 대표의 「가신트리오」중 한명이다. 맏형격인 권 의원이 조직·자금을,김 의원이 수행을 맡아온데 비해 한 의원은 정책·홍보쪽을 전담해왔다. 한 의원은 김 대표가 태여난 섬(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서쪽 10㎞ 떨어진 더 조그마한 우이도에서 나서 중·고교를 목포(목포고)에서 보냈다. 어릴적부터 이심만만한 고향출신 정치인의 「도전과 집념」을 사표인양 간직해왔다. 김대중대표 곁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서울대외교학과 재학때였지만 숙명적인 끈은 훨씬 오래전부터 맺어진 셈이었다.
그는 첫 대면에서 『김 대표의 정치적 식견과 열정에 감복하고 고향 대선배님의 정치적 장래와 성장에 평생을 이바지 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고 했다.
대학졸업후 목포도자기회사(행남사)에 잠시 취직했던 그는 그 유명한 7대(67년) 목포선거전에 김 대표의 운동원으로 뛰어든다. 파란 만장한 「동교동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그는 김대중후보의 참모이자 조직의 명수라는 엄창록씨 밑에서 독특한 조직관리의 묘미를 처음 맛보았다. 엄씨는 박정희대통령이 공화당의 김병삼후보를 당선시키고 김 대표를 낙선시키기 위해 임시국무회의를 목포에서 여는 등 총력전을 폈던 이 선거에서 신출귀몰한 솜씨로 여당을 교란한 전설적 인물이다.
한 의원은 그때 조직기술의 진수를 배웠고 곧 40대기수끼리 붙은 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때 경남지역의 조직책임을 맡아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경남·부산에는 김대중후보의 성장뿌리였던 「50년대 민주당 신파」세력이 상당히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김영삼후보측을 헐뜯지 않는 그의 독특한 분위기와 접근자세가 먹혀들었다.
어쨌든 경선에서 경남대의원들의 상당수가 김대중후보쪽으로 넘어와 김 후보의 신임을 얻게됐다. 당시 김영삼후보의 경남조직 담당은 최형우의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붐」을 일으킨 대통령선거 패배는 김 대표 본인은 물론 핵심 추종자들에게 좌절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유신선포→DJ의 망명→납치→자택연금의 70년대 내내 그는 단조롭지만 고달픈 동교동 출·퇴근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보비서를 맡아 김 대표의 견해와 근황을 주로 외신기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78년 새해 첫날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인 「김대중선생」을 찾아갔다가 교도관 승낙 없이 병실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한 이 사건은 10년뒤 그의 예정된 도약을 막는 결정적 약점이 되고 말았다. 호남에서 평민당 말뚝만 박으면 당선됐던 88년 13대총선때 그는 형실효가 안됐다는 이유로 출마자격을 잃었다.
「14대양보」조건부로 그의 지원을 받아 당선했던 박형우의원이 14대 공천에서 끝까지 경합해 그를 애먹였다.
「김대중학교」의 우등생이고 김 대표에게 누구못지 않게 충성을 바쳤지만 의원배지달 기회는 힘들게 찾아온 것이다.
정치에 입문한지 25년만인 92년 4·26총선(신안)에서 비로소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권모술수가 평가받는 험난한 야당바닥에서 주로 해외창구를 맡아 외견상 점잖게 김대중선생을 재기케 하는데 기여했다. 84년 난생 처음 여권을 발급받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브란트 전서독총리·팔메 스웨덴총리 등을 만나 김 대표의 정치적·인간적 가치를 알리고 권력으로부터의 억압을 선전했다.
그가 야당정가의 랑인군에 끼어 지내오는 동안 생계는 중학교 미술선생인 부인(정순애·44)이 도맡았다.
한 의원에게 남은 가장 큰 재산은 김 대표의 「대권3수」를 지켜보면서 터득한 김 대표 모시기의 신조와 노하우다. 그는 김 대표의 긍정적인 면을 가장 절실히 보고 배운 참모다.
『김 대표는 공부하고 노력한다. 그 옆에 있으려면 역시 공부해야 한다. 김 대표는 「내가 성장한만큼 여러분도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참모로 있으려면 자기발전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김 대표의 주문은 한 의원에게 공부하는 체질을 익히게 했다.
한 의원은 김 대표 참모들중 빛을 못본 편이라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다르다. 『YS는 유신 이후 정치권에 남아있어 자기사람을 심을 수 있었지만 DJ는 87년 복권때까지 정치공백이 길어 「측근」을 키울기회가 적었다』는 것이다.
14대땐 동교동 비서출신 15명이 원내에 진출한 것만 봐도 김 대표가 무심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박보균기자>
□한화갑의원 약력
▲전남 신안출신(53세) ▲서울대외교과졸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수학 ▲67년 이래 김대중대표의 조직·홍보·정책분야 보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으로 세차례 투옥 ▲평민당 정책실장 ▲14대의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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