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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추적] 원저자 대신 병원장이 제1 저자 된 이유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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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03면

“2005년 미국 ‘생식의학회지’에 발표된 ‘혈액검사를 통한 조기 폐경 위험진단’이라는 논문이 있어요. 포천중문의대 차병원그룹의 차광렬 학원장이 제1저자고 차병원 불임센터의 이숙환 교수 등이 공동저자로 돼 있지요. 하지만 원래 핵심 저자는 한때 차병원에 몸담았던 김정환 박사라는 주장이 나와 표절 시비가 일고 있어요. 김 박사가 차 원장과 이 교수를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고, 이 교수 역시 김 박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했답니다.”

해외 언론이 주시하는 車병원 국제학술논문 법적 공방

후배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후배는 “차병원이 국내 최대 전문병원이고, 차 원장이 미국 할리우드 차병원 원장이어서 국내외 의학계의 관심이 크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자에게 생소한 사건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미국에선 큰 이슈로 여러 차례 언급된 반면 국내에선 국제기사로 짤막하게 처리됐던 것이다.

미국 유력지인 ‘LA 타임스’는 세 차례에 걸쳐 크게 다뤘고, 미국 과학저널 ‘사이언티스트’와 영국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도 비중있게 취급했다. 영국저널 등은 “황우석 사태 이후 계속돼온 한국 과학계의 신뢰회복 노력이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한 반면 국내에선 후속 보도가 없었다.

먼저 서울중앙지검을 찾았다. 이 교수는 지난해 12월 불구속 기소됐고, 차 원장은 ‘참고인 중지’ 상태였다. 고소인 김 박사가 싱가포르 국립병원 의사로 해외 체류 중이어서 조사가 일시 중지됐던 것이다. 이 교수 기소 내용도 확인했다. “김 박사가 고려대에 낸 박사논문을 이 교수가 2004년 대한산부인과학회지에 이어 2005년 미 생식의학회지에 싣는 과정에서 제1저자 이름을 김 박사 대신 차 원장으로 바꿨다. 김 박사의 저작 인격권을 침해한 것이다.”

15일 열린 이 교수 재판을 지켜보고 미국 인터넷 사이트에 실린 이 교수 본인의 해명, 차병원 측의 입장을 들어봤다. 이를 종합하면 이렇다.

“차 원장이 연구 아이디어를 이 교수에게 줬고, 다시 이 교수가 김 박사에게 줬습니다. 실제 실험ㆍ분석을 한 것도 차병원 연구원들이고요. 김 박사는 실험 결과를 넘겨받아 통계작업만 했어요. 연구성과는 차병원 소유입니다. 또 생식의학회지 쪽에서 저자 사인을 요구하는데, 김 박사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이름이 빠진 거고요.”

차 원장 이름이 제1저자로 오른 데 대해 차병원 측은 “연구 전반을 주관했다는 점에서 자격이 있다”면서도 “차 원장 자신은 저자순위나 명단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기자는 차 원장과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외유 중이라서 연락이 어렵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 박사 측은 “이 교수나 차 원장에게서 아이디어를 받은 적이 없다”며 ‘명백한 논문 도용’이라고 했다. 이어 “이 교수가 생식의학회지에 싣자고 했으나 ‘중복 게재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며 “산부인과학회지 논문 초고에 e-메일과 부친 집주소ㆍ전화번호가 있는데 연락이 안 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또 “연구비용은 내 돈으로 충당했다”고 맞서고 있다.

미 생식의학회지는 지난 2월 관련 논문을 ‘표절’이라고 지적했다가 차 원장 측이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자 지난달 ‘중복 게재’로 규정한 뒤 논문은 철회키로 했다. 검찰은 김 박사와 차 원장에게 ‘5월 말 일시 귀국해 조사를 받으라’고 통보해 놓은 상태다. 그 조사 결과가 사건의 분수령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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