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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송의 드로잉 에세이-벌레와 목수 [10ㆍ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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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18면

‘악몽’

벌의 식량을 빼앗는 버릇이야 오늘날도 여전히 남아 있어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벌레의 몸 자체에 식탐을 보이는 경우는 ‘야만’으로 분류된 문화에만 존재한다. 사고나무를 넘어뜨려 벌레 농사를 짓는 부족이 아직 남아 있지만, 문명인은 그들이 아직 야만의 그늘에 머물러 있다고 믿는다. 매미나 전갈 혹은 번데기나 애벌레를 삶거나 튀겨 먹는 행위에 엽기적인 시선을 보내는 인간은 스스로를 문화적인 그룹으로 분류한다. 바로 그런 인간들이 벌레를 징그러운 벌레 보듯 한다. 인간은 스스로 문화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면서 벌레를 멀리했다. 인간의 문화란 그런 것이다. 야만을 가르치기 위해 문명이 필요했던 것처럼 벌레에 대한 차별은 인간의 습관적인 자만에서 시작된다.
벌레와 함께 인간이 혐오하는 동물군은 단연 뱀과 쥐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들에 대한 적대감을 지닌 인간들의 반응은 극단적이다. 인간들을 모아 혐오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켜보면 각기 다른 이유로 이들을 미워한다. 뱀은 징그러운 몸 때문에, 쥐는 털이 벗어진 꼬리 때문에, 곤충은 주름진 배가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보다 더 절실한 이유는 ‘무조건 싫어!’이다.

벌레는 현대 사회의 ‘희생양’

나이에 따라 혐오하는 동물이 다르다. 나이 든 사람들은 뱀ㆍ쥐ㆍ벌레의 순으로, 비교적 젊은 사람은 벌레ㆍ쥐ㆍ뱀의 순으로 혐오한다. 만일 이게 통계적으로 사실이라면(이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통계조사를 한번 해보고 싶다!) 이들에 대한 혐오가 교육되었음을 방증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혐오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뱀과 쥐와 벌레는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차례로 등장한다. 뱀은 숲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밭을 일구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적이다. 쥐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거 등장해 인간의 식량을 탐하는 약탈자이자 치명적인 병원균의 보균자로 악명을 날린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은 곤충들은 여전히 도시 아파트의 문틈 사이로 기어들어올 수 있는 존재다.

최근 벌레들에 대한 혐오감은 미생물에게까지 이어진다.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세련된 주부라면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에 존재하는 벌레들을 더 두려워할 것이다. 현미경으로 몸에 달라붙은 미세벌레나 박테리아의 끔찍한(!) 사진을 본 아이들은 평생 매일 샤워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청결병에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 혐오동물을 묻는 설문지의 난에다 ‘모공충’이라고 쓸지도 모르겠다.

벌레에 덧씌워진 야만의 이미지
숲이나 들판에서 인간을 공격했던 뱀이나 벌에 대한 적대감은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훈련된 감정이다. 그러나 쥐나 바퀴벌레는 명백히 공공연한 계몽과 교육에 의해 혐오의 대상으로 분류되었다. ‘쥐를 잡자’는 슬로건은 단지 슬로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쥐 잡는 날’은 일상으로 자리 잡고 쥐꼬리를 학교에 갖다 바쳐야 할 때, 쥐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쥐와 동급으로 분류되던 이와 벼룩, 빈대 그리고 파리, 모기는 공중 살포와 차량 살포의 연막 속에서, 디디티의 범벅 속에서 경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벌레는 현대 사회에서 열등과 무지, 저개발, 낙후, 야만으로 분리되는 공공의 적이었다. 이는 벌레의 습성을 덜 문명화된 야만의 흔적들과 일치시키려는 계몽과 학습에 의해 증폭된다. 무질서하게 떼를 지어 다니거나 비사회적인 양태를 보이는 독립적인 활동, 시커멓거나 때로 지나치게 화려한 모습, 인간과 유사하되 다른 생김새, 다른 몸에 달라붙어 사는 기생적인 습성 등은 벌레에게 덧씌운 야만의 이미지다.
벌레를 박멸하는 일은 국가적인 사업이다. 문명사회로 가기 위해 정부는 엄청난 재원을 투여해 야만을 물리치기 위해 애쓰지만 『곰에서 왕으로』를 쓴 나카자와 신이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가 야만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국가는 야만의 발생을 토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벌레들에 대한 적의를 그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된 것은 현대와 문화와 계몽의 헤게모니 쟁탈 속에 무언가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 쥐는 이루지 못한 자급자족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식량을 축내는 주범으로 지목되었으며, 낙후된 주택구조와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주범으로 낙인 찍혔다. 하수도 정비를 미룰 때마다 모든 책임은 시궁창에 끓는 쥐에게 돌아갔다. 오랜 장마가 끝난 뒤 청결과 위생을 지향하는 현대가 위협을 받는 위기 상황이 올 때면 어김없이 연막이 살포된다. 연막 속에는 벌레들이 아닌 사람들을 향한 계몽의 음험한 음모가 스며 있었다. 정부가 여러분을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허장성세의 매캐한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다.

생명권을 폐허로 만드는 인간
쥐나 이ㆍ벼룩에 대한 집단적 공격이 공적인 계몽의 영역에서 벌어졌다면, 파리ㆍ모기와 바퀴벌레에 대한 공격은 최근까지도 매우 사적인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벌레와 인간의 전쟁에서 먼저 승전보를 알려온 것은 인간이다. 현대라는 파렴치한 사회에서 벌레를 박멸하는 수많은 화학폭탄이 양산되었다. 초토화해야 할 벌레들은 따로 악의 축보다 무시무시한 해충이라는 이름이 들씌워졌다. 인간이 아무리 험한 이름을 내걸어도 벌레가 인간의 발명품보다 악독했던 적은 없었다. 디디티의 위력은 벼룩의 이빨을 뛰어넘어 인간의 신경을 물어뜯을 정로로 강력하다는 것이 판명되어서야 겨우 사라졌다. 벼멸구에 들이부은 파라티온에 숨넘어간 건 개구리뿐만이 아니다. 틸 바스티안은 『가공된 신화, 인간』에서 “자기와 다른 모든 동물을 차별화하고 다른 생명체를 멋대로 조작하는 인간, 배타적 윤리적 원칙을 자기 기준에 맞추어 재단하는 인간은 장기적으로 생물권 전체의 다양성과 유연성을 침탈함으로써, 자신이 속해 있는 그 생명권을 폐허로 만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청결과 위생을 모던(modern)의 가장 그럴듯한 외피로 받아들였던 선구자들은 벌레를 떨어내기 위해 씻고 닦고 소독하는 문화와 교양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물론 눈부신 산업의 혜택으로 한 방에 파리ㆍ모기를 날려버리는 킬러들이 대거 등장했고 레이더까지 동원된 바퀴벌레와의 전투가 수시로 벌어졌다. 심지어 몸 안의 벌레까지 한꺼번에 몰아내 깔끔하고 상쾌한 내장도 갖게 되었다. 이제 쓸고 닦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집 안에서 아이들의 아토피만 걱정하면 된다.

벌레가 깡그리 사라져버린 것일까? 물론 아니다. 여전히 지구에는 벌레들이 가득하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수많은 화학무기의 개발로 인간의 완전한 한판승으로 끝나버릴 것 같았지만 벌레들은 살아남아 있다.

인간 그리고 벌레를 포함한 자연의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불리한 환경조차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거나 적응시켰다. 벌레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에게도 필요하며 그들이 변화시킨 것은 인간에게도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이 없다면 벌레도 없고, 벌레가 없다면 인간도 없다. 어느 누구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 자체의 위기의 관점에서 벌레와의 공생은 필수적이다. 그것이 현재까지 인간이 찾아낸 최상의 공존 의지다. 벌레가 징그럽게 생겼다고 호들갑을 떠는 인간들의 덜떨어진 감정을 어루만져줄 여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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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김씨’ 김진송씨는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쓴 근대 연구자,『기억을 잃어버린 도시』의 소설가,『이쾌대』의 미술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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