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론더링(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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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71 260 SQ8.
얼핏 보면 007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들의 암호같지만 사실은 스위스은행의 「B형」 계좌번호다. B형계좌란 예금주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변호사나 공증인 등 제3자를 통해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무기명 비밀계좌를 말한다. 그래서 스위스은행은 독재자나 마약밀매업자·마피아 등이 불법으로 긁어 모은 「검은 돈」의 은닉처로 악명이 높았다.
스위스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89년말 현재 B형계좌는 3만개에 달하며 이 계좌에 예금된 돈은 무려 1천3백50억달러로 밝혀졌다. 물론 이 가운데는 마르코스 전필리핀대통령,뒤발리에 전아이티대통령,차우셰스쿠 전루마니아대통령,전파나마 독재자 노리에가 등의 돈도 포함돼 있다.
스위스은행이 이들 부패한 독재자나 범법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그들이 부당한 수법으로 모은 「검은 돈」을 「세탁」해 「깨끗한 돈」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스정부는 빗발치는 세계 여론에 굴복,1934년 개설이래 57년동안 지켜오던 이 비밀계좌제도를 오는 9월말로 폐지키로 했다.
이른바 「돈 세탁」이라고 불리는 「머니 론더링」(money laundering)은 높은 위험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세탁」하는데는 고도의 기술이 따른다. 거액의 수표를 가명계좌에 넣어 작은 액수의 수표로 쪼갠 다음 현금화하는게 가장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이밖에 수표바꿔치기,어음할인,증권 가명거래,암달러 매입후 해외에 반출했다가 다시 반입하는 수법도 있다.
지난 89년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매년 머니 론더링을 통해 국제금융시장에 거래되고 있는 「검은 돈」이 자그마치 1조달러나 된다고 소개했다. 특히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중남미지역에서 머니 론더링은 더욱 기승을 부려 80년대 이지역에서 해외로 유출된 돈이 2천억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중남미경제를 좀먹는 독버섯이다.
실명제가 실시되고 1만달러 이상의 예금에 대해서는 자금출처를 조사하는 미국에서도 머니 론더리업은 성행하고 있다. 「검은 돈」의 그 끈질긴 생명력을 짐작할만하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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