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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 시대 10년 만에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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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토니 블레어(54) 영국 총리가 10년 권좌에서 물러난다. 블레어 총리는 "다음달 27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10일 밝혔다. 블레어 총리는 이날 자신의 지역구인 잉글랜드 북동부 세지필드의 트림던 노동당 클럽에서 "10년은 나 자신뿐 아니라 국가로서도 충분한 기간"이라고 말했다.

집권 노동당은 다음달 23일 특별 전당대회를 열어 블레어의 후임 당수를 선출한다. 영국에서는 제1당의 당수가 총리가 된다.

임기가 2년 가까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퇴임을 발표한 한 것은 사임 압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이라크전에 깊숙이 개입한 것과 최근 정치자금 스캔들과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은 것이 그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1년 사이 노동당의 지지율은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끄는 보수당에 뒤져 왔다.

그의 후임에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이 선출될 것이라고 더 타임스 등 영국 언론들은 전망하고 있다. 블레어 총리와 함께 '뉴 레이버(노동당)'를 건설한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인 브라운 장관은 그동안 블레어의 조기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해 왔다.

블레어는 1997년 '제3의 길'을 내세워 보수당의 18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44세의 나이에 최연소 영국 총리가 됐다. 노동당 출신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그는 97년에 이어 2001, 2005년 등 세 번의 총선에서 연속 승리를 이끌어냈다.

블레어 정부가 가장 내세우는 치적은 경제 부흥이다. 그는 정통 좌파인 노동당을 '제3의 길'로 이끌며 우파 못지않은 친기업적 시장주의 경제를 지향했다. 그 결과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유럽의 최고 수준인 3%대로 올라가고 실업자는 크게 줄었다.

북아일랜드에 평화를 정착시킨 것도 블레어의 주요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수십 년간 유혈충돌을 빚어 왔던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세력이 이달 공동 자치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게 된 데는 블레어의 강온 전략이 먹혀들었다는 평가다. 이 밖에 의료제도 개혁, 최저임금제 도입 등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블레어는 또 교육 관련 예산을 대폭 늘리고 저소득층 자녀의 교육기회 확대를 위해 노력한 점도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총리직을 떠나게 된 블레어에 대한 평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퇴장을 앞둔 블레어를 '비극적 영웅'이라 표현했다.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의 이라크전쟁을 적극 지원한 데 따른 후유증과 정치자금 스캔들로 입은 흠집 때문이다.

외신들은 블레어가 퇴임 후 유럽연합(EU)이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서 활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블레어는 재임 중 아프리카 빈곤과 에이즈 문제, 기후변화 등 국제적인 이슈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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