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기자의헬로파워맨] 전도연 "자신 있는 거 ? 부서져도 지기 싫다는 독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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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읽고 막막했어요 자신 없고 어렵고… 갈 때까지 가보자 승부수 던졌죠 아이 유괴당하고 전화 받는 장면 감정이 안 나오더라구요 허벅지 꼬집고 입술 깨물며 날 괴롭혔죠 데뷔 16년 만에 처음 못 하겠다고 했어요 평생 꿈이 현모양처였어요 끼도 없고 얼굴도 예쁘지 않아 연예인이 될 줄 몰랐죠

송강호가 옳았다. "'밀양'은 이창동 최고의 걸작이다." 그가 '헬로 파워맨' 인터뷰(4월 19일자)에서 한 말이다. "'살인의 추억'이 송강호, '박하사탕'이 설경구의 영화라면 '밀양'은 전도연(사진)의 영화가 될 것"이란 말도 들어맞았다. 그건 전도연에게 출연을 권유하며 했던 말이다.

사실 전도연은 자신이 없었다. 바람 피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내려와 살다 아들마저 유괴로 잃는 기구한 여자. 가까스로 신에 귀의해 원수(유괴범)를 용서하려 했으나, 옥중의 유괴범은 이미 신에게 구원받았다며 오히려 복음을 전하려는 기막힌 아이러니 앞에서 망연자실한 여자. 그래서 신을 '엿 먹이려' 바둥거리는 여자 신애가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다.

"막상 시나리오를 읽고 나니 너무 막막했어요. 자신 없고, 어렵고. 감독님은 오히려 솔직하게 얘기해 줘 고맙다, 자신 있다고 했다면 배우로서 신뢰하지 못했을 거라 하셨죠. 그 말에 승부수를 던졌어요.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는."


그건 비상이었다. 개봉(24일) 전이지만 전도연의 연기에 찬사가 쏟아진다. "기복이 심한 감정의 흐름 속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대범함""더 이상 보여줄 게 없을 줄 알았던 전도연, 예상을 깬다" 같은 호평이다. 문화부장관 등 4년간의 공백을 말끔히 지워 버리고 작가감독임을 재입증한 이창동의 연출, 완급을 조절하는 조연의 역할이 무엇인지 제대로 간파한 송강호(종찬 역)의 영민한 연기 못잖은 성취다.

'밀양'의 전도연은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는 여자다. 천진한 시골소녀('내 마음의 풍금' '인어공주')에서 아이에게 벌레 든 우유를 타 먹이고 정부에게 달려가는 불륜녀('해피엔드'), 에이즈 환자('너는 내 운명')까지 종횡무진 뛰어왔지만, 이번 배역은 그중 최고난도에 속한다.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자의 숙명을 담은 연기다. '밀양'은 16일 개막하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다. 해외영화제 레드카펫을 처음 밟는 그에게 벌써부터 수상을 바라는 덕담까지 쏟아지고 있다. 7일 삼청동에서 그를 만났다.

16년 만에 처음 촬영을 포기하다="감정이 차곡차곡 쌓여야 가능한 영화니까 순서대로 찍었죠. 가장 큰 고비는 유괴당한 날 전화 받는 장면이었어요. 울부짖는 게 보통일 텐데 그 감정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내가 엄마가 아니어서 그런가, 새벽 3~4시까지 허벅지 꼬집고 입술 깨물며 최대한 나를 괴롭혔죠. 결국, 못하겠다고 했어요. 데뷔 후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럴 수도 있겠다, 오히려 유괴당한 엄마에겐 현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질 거다, 하셨죠."

이 장면에서 전도연은 절규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줄곧 끌고 가는 시선과도 맞아떨어진다. 운명의 가혹함을 냉정하게 그리는 것이다. 이창동의 동정 없는 리얼리즘이다. 이미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유괴범을 면회하고 나오던 신애는 말없이 푹 고꾸라진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다. "온몸에서 모든 기가 빠져나가는 느낌, 깨어 있지만 혼수상태가 된 느낌으로 연기했죠."

강에 떠오른 아이의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은 원경으로 찍혔다. 카메라는 아이나 신애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주인공의 고통을 과장되게 강요하는 기왕의 가학적 스타일과는 거리가 느껴진다.

감독님, 답을 주세요="감독님 연출 스타일요? 정확한 디렉션을 안 주세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애매모호하세요. 화가 나 따지고 시위도 했죠.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스스로 답을 찾게 하신 거 같아요. 어쩌면 감독님 자신도 혼란스러웠던 것 같고. 엔딩 촬영까지 시나리오는 완벽하지 않았어요. 찍고 편집하면서 답을 찾으신 거죠. 또 무엇이 정답인지 모른 채 혼란스럽게 연기한 게 오히려 상투적인 연기를 피하게 한 것 같기도 해요."

#대단한 배우, 송강호="현장에선 대단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냥 놀러 나온 사람 같거든요. 역시 화면을 통해서 보니까 왜 대단한지 알겠더라고요. 관객들이 신애의 고통을 버거워하다가도 종찬 때문에 웃으며 영화를 보는 거예요. 종찬에게 관객들이 그렇게까지 호응할 줄 몰랐거든요. 정말 스크린에서의 존재감이 뭔지 보여주는 배우예요. 예전에 극장서 '살인의 추억' 보다가 너무 흥분해서 벌떡 일어선 적이 있어요. 강호 선배의 "여기가 강간의 천국이야?"하던 그 장면."

#일과 사랑=5개월간 탈진이 계속되는 기간 중 그는 생의 반려를 만났다. 모든 것을 잃은 여자를 연기하며 배우는 모든 것을 가졌다? 최고의 연기를 했고, 결혼도 하고.

"촬영 후반부 남편을 만났는데, 상실감을 연기하면서 황폐한 내면이 저도 모르게 위로를 원했나 봐요. 저는 원래 사람은 4계절을 만나봐야 안다, 사랑엔 시간이 필요하다는 편이었는데, 너무 빨리 연애하고 결혼해서 스스로 놀라는 중이에요."

텅 빈, 그러나 큰 배우=영화잡지 '씨네21'의 최근 영화인 설문조사에서 전도연은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 3위, 티켓 파워 7위에 올랐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송강호, 황정민 다음이다. "여배우 중 연기 스펙트럼이 가장 넓다" "인간미와 신비감을 동시에 지녔다"는 평도 받았다. 이영애.김혜수와 함께 충무로 간판 여배우 3인방이지만, 산골소녀에서 요부로 직행하기에는 그만한 이가 없다.

물론 데뷔 초 그는 한동안 TV청춘물의 조연에 머물렀다. 작은 키에 앞짱구, 아이처럼 앵앵대는 비음. 귀염성은 있지만 '물건'은 아니었다. 그의 평범함에 감춰진 근성을 간파한 것은 1990년대 충무로 뉴웨이브였다. '접속' '해피엔드'에 이어 여성액션 누아르('피도 눈물도 없이'), 사극('스캔들'), 신파 멜로('너는 내 운명') 등이 이어졌다. 틈틈이 출연한 TV멜로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꿈이 없는 배우"라고 했다. "그저 평생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끼도 없고 얼굴도 예쁘지 않아 연예인이 될 줄도 몰랐고요. 지금 이 자리까지도 어떤 목표를 갖고 온 게 아니에요. 가끔 내 안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해요. 타고난 감정이 고갈되면 연기도 고갈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죠. 자신 있는 건, 글쎄 승부근성?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내가 부서져도 지기 싫다는 독기!"

그러나 이 '비어 있음'이 어쩌면 이 무정형의 배우를 오늘에 이르게 한 힘은 아닐까 싶다. 도저히 하나로 꿸 수 없는 천의 얼굴을 천연덕스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견고한 자의식 대신 텅 비어 누구든 쓱 밀고 들어올 수 있는 그녀의 말랑말랑한 내면 때문 아닌가 말이다. 그가 인기나 명성에 비해 유독 CF 출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연기로 자기를 넓히는 똘똘한 배우' 외에 언뜻 떠오르는 수사가 없다. 대중이 원하는 정형화된 이미지로 먹고 사는 시대에, 이 작은 체구의 배우는 이미지 아닌 연기의 힘으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글=양성희 기자<shyang@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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