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사회변동』 심포지엄|중앙일보사 한국사회학회|「6·25」후유증 반작용|『출산율의 변동』 <이흥탁·외대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한국전쟁은 인구학적 측면에서 전쟁이 지속된 기간뿐만 아니라 그후 몇십 년 동안 커다란 변화를 야기 시킨 주 요인이다. 전쟁 직후 나타난 베이비붐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전쟁으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본 연령층은 20∼29세 남성인구. 지역적으로는 서울·경기지역의 피해가 가장 컸다. 1949년부터 높은 출산율을 보이기 시작한남한의 인구는 한국전쟁 기간 중 잠깐 주춤하다가 1955년부터 고 출산경향이 재개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베이비붐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즉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한국의 인구는 베이비붐현상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컨대 한국전쟁이 베이비붐을 야기 시킨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고 출산경향을 한층 가속화시켰다고 보는 쪽이 적절한 해석이다.
베이비붐은 위기상황과 같은 예기치 않았던 외적요인과 산업화·근대화과정 등 내적 요인에 기인하기도 한다. 1950∼60년대를 전후하여 산업화와 근대화과정을 밟고 있던 제3세계 국가에서 베이비붐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좋은 예다.
해방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냉전이 한국전쟁의 근본원인이긴 하나 순수하게 인구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또 다른 해석이 내려질 수도 있다. 북한 집권층이 인구 면에서의 열세를 극복하고 북한주민들의 내부응집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남북간 힘의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기 전에 통일을 이루고, 해방이후 해이해져 가던 북한 주민들의 사상을 재무장하는데 한국전쟁은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격심한 인구이동을 토대로 토지의 재분배 등 과감한 사회개혁을 실전에 옮길 수 있는 호기를 마련해 줬으나 피해복구에만 급급하다 놓쳐버렸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전국의 대학을 술렁이게 했던 대학생 소요사태는 서서히 퇴조하다 2000년을 고비로 찾아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대학생 소요사태는 베이비붐에 의한 「팽창된 젊은이들의 인구구조」에 연유하는 것인데 2000년대부터는 젊은 층의 인구비중이 급속히 감소할 뿐만 아니라 베이비붐 시대에 출생한 젊은이들이 기성세대 층으로 흡수되면서 보수성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