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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코지의'강한프랑스'] '집념의 리더십' 이민2세서 엘리제궁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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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프랑스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니콜라 사르코지가 6일 지지자들이 운집한 콩코르드 광장으로 가던 중 거리의 시민들에게 차창 밖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 지지자는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와 같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파리 AFP=연합뉴스]

"52년간 프랑스는 제게 많은 걸 베풀었습니다. 이젠 제가 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치겠습니다. 위대한 조국 프랑스를 사랑합니다. 공화국 만세. 프랑스 만세."

니콜라 사르코지는 6일 밤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를 확정하는 순간 6300만 국민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강성 이미지의 평소와 달리 목소리는 상당히 떨렸다. 보잘것없는 헝가리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집념과 열정의 연속이었다.

◆ 잊고 싶은 유년의 추억=그의 아버지 팔 사르코지는 1940년대 헝가리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무작정 프랑스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서 먹고살기 위해 용병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에 지원했지만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 뒤 의사의 딸과 만나 결혼, 세 아들을 낳았다. 둘째가 니콜라였다. 그래서 사르코지에겐 늘 이민 2세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프랑스 국적을 안겨준 어머니 역시 당시 유럽에서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던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인생 출발선은 친구들보다 저만치 뒤에 있었다. 그러나 뒤처진 출발선이 그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사르코지는 프랑스에서 출세 코스인 그랑제콜(엘리트 양성 전문 교육기관)에 가는 대신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떴다. 학업도 집안도 시원찮았던 그는 정치만이 자신을 진정한 프랑스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 18세에 정치 입문=74년 19세의 사르코지는 공화국민주연합(UDR) 당원으로 들어가 당시 드골의 후계자로 떠오른 자크 시라크 진영에 줄을 댔다. 81년 시라크 지지 청년회장 당시 시라크가 옆자리에 앉은 사르코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장면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시라크는 그를 최고의 책사로 평가했다. 사르코지의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피에르 샤롱은 이렇게 말한다. "시라크 등 수십 년 정치 선배들도 골치 아픈 문제가 있으면 나이 어린 사르코지를 찾곤 했다. 세 가지 정도의 아이디어를 갖고 그에게 가면 열 가지의 변수까지 배우고 나오게 된다."

그는 영민함 못지않게 배짱도 타고났다. 93년 파리 서부 뇌이쉬르센 시장 때 일이다. 관내 유치원에 복면 강도가 들었다. 폭탄이 든 가방을 메고 들어온 강도는 21명의 원생과 보모를 인질로 잡고 몸값을 요구했다. 특수부대가 동원됐지만 어린이들의 안전 때문에 작전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사르코지가 혼자 사지로 뛰어들었다. 몇 시간에 걸친 승강이 끝에 그는 인질범을 진정시켰고 마침내 모든 어린이를 구해낼 수 있었다. '작전'을 수행한 뒤 인터뷰에서 그는 "다시 하라면 사양하겠지만 그럭저럭 할 만했다"며 여유를 보였다.

◆ 시라크와의 악연=단순한 정치꾼으로는 생명이 짧다고 판단한 그는 정치 인생에 살을 붙이기 위해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파리에서 부동산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주류층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95년 그는 최대 위기를 맞는다. 당시 대선에서 공화국연합(RPR)이 시라크와 에두아르 발라뒤르 두 명의 후보를 내자 시라크를 버리고 발라뒤르 진영으로 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선 가능성이 더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라뒤르는 1차에서 탈락하고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시라크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그를 거두지 않았다. 시라크에겐 이런 앙금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시련은 기회다=그에겐 시련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고통을 견디며 더욱 강해졌다. 이민자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이 그랬고, 95년 잘못된 선택도 크나큰 정치적 시련이었다. 2005년 기다리던 총리 대신 넘버 2인 내무장관이 됐을 때에도 그는 특유의 돌파력을 보였다. 이른바 '선택적 이민'이란 신조어를 만들며 불법 이민자와 범죄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편 것이다. 이민자들과 소외계층엔 적이 됐지만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정치란 1%라도 더 유리하면 그쪽을 택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2005년 파리 교외 폭동 때도 그는 정면돌파했다. 이걸 계기로 그는 치안과 공권력의 상징 인물로 부상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 바로잡습니다

5월 8일자 5면 '사르코지 인생 스토리' 기사 중 "63년 18세의 사르코지는 공화국민주연합(UDR) 당원으로 들어가…"로 썼으나 각각 74년과 19세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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