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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 파도 타는 학생운동 구심점|전대협 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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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약칭「전대협」의장은 우리 나라 학생운동권의 실질적 구심점이다.
전국 1백83개 대학, 모두 27개 지구로 구성된 전대협을 대내외적으로 대표하고 조직의 주요사업과 투쟁방향을 설정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80년 후반기이후 급속도로 달아오른 반미·통일운동의 선봉으로서 전대협 의장은 늘 당국의 추적과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함께 받았다.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 없이는 조직내부의 결속은 물론 효과적인 반제투쟁을 전개할 수 없다」는 이른바 「혁명적 수령관」에 따라 의장은 운동권 안에서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아 「의장님」「그 분」「지도자」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에겐 수사기관의 사전 구속영장이 꼬리처럼 따라다녔고 역대의장 치고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수난을 겪었다.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의장은 지금도 「도바리」(운동권용어로 도망자라는 뜻)신세를 면치 못한다. 지난달 제6기 의장으로 뽑힌 태재준군(23·서울대 학생회장) 역시 선배들의 예에 따라 당선과 함께 사전영장이 발부돼 수배상태에 있다.
이 같은 신변위협 때문에 의장에겐 통상 5∼6명 가량의 무술유단자로 구성된 경호원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 일선대학을 방문할 때는 학교마다 조직돼있는 「사수대」가 그의 신변을 책임지게 돼있다.
때로는 「경호차」가 수행하기도 하고 아파트 등에 은신처를 마련해두기도 한다.
지난달 말 전대협은 기대와 우려 속에서 6기를 맞았다.
87년8월 제1기 의장으로 뽑힌 이인영군(28·당시 고대 총학생회장)으로부터 6기 태재준군까지 전대협 의장은 기마다 새로운 학생운동의 영역을 넓혀왔고 기구개편 등 조직강화에 애써왔다.
「대선 투쟁」 「평양축전」 「범민족대회」등 각 기의 역점사업을 이슈화해 성명서를 내는 평화적인 투쟁에서부터 가투·점거농성 등 초강경 방법까지 동원하는 등 다양한 전략·전술로 공안당국과 숨바꼭질을 해왔다.
이 와중에 「연와시위」「인간사슬시위」등 새로운 시위기법이 거리를 풍미했으며 「평축」이 한창이던 89년 여름 대학가엔 북한노래·복장 등 거센 「평양바람」이 불기도 했다.
제1기 의장 이군은 87년8월19일 서울·부산 등 전국9개 지역의 각 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들이 충남대에 모여 전대협을 결성한 뒤 만장일치로 의장에 선출됐다.
4·13호헌조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사건, 이한열군 최루탄피격 사망사건 등 시국동요의 파도를 타고 「6월 항쟁」주도세력인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의장 이군의 주도아래 최초의 전국적 단일학생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전대협 의장은 6월 개헌정국의 아들로 태어난 셈이다.
『애국의 물결로 휘몰아쳐라, 내 사랑 한반도여』라는 소박한 슬로건을 내건 이군의 제1기는 대통령직선제로의 선회 후 불어닥친 선거열풍에 휩싸여 초반부터 김대중 비판적 지지파, 후보단일화파, 민중후보 추대파 등 3개 파로 갈리는 내홍을 겪었다.
결국 이군 등 지도부가 비판적 지지에 한 목소리를 냈지만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설득하지 못한데다 김 후보가 패배함으로써 전대협은 한때 존폐의 위기에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제1기는 선거당시 대규모 대학생 공정선거 감시단을 구성, 투·개표과정을 지켜보는 등 처음으로 조직적인 선거감시기능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군은 그해12월 서울시경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1년6월의 실형을 살고 나와 현재 전국연합 정책실에서 활동하고있다.
사분오열 됐던 전대협이 사실상 자리를 잡은 것은 「남북은 통일로」라는 기치아래 통일운동이라는 새 방향을 설정한 오영식군(26·고대 총학생회장)의 2기 때부터.
오군은 6·10, 8·15남북학생회담을 이슈화해 길거리에 드러눕는 「연와시위」를 주도하는 한편 북한 바로 알기 운동, 국토순례대행진 등을 통해 당시 금기시 됐던 통일문제를 학생운동의 전면에 내세워 침체된 운동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기는 대학마다 「통일선봉대」를 조직했으며 전대협 내에도 「조통위」를 신설하는 등 통일운동을 위한 하부조직을 강화했다.
88년9월 올림픽기간 중 남한단독올림픽 반대시위를 주도하다 오 군이 구속된 뒤 의장대행을 맡은 정명수군(26·연대 학생회장)은 5공 청산문제와 관련, 국회에서 증언까지 하는 등 색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군의 2기 대행체제는 5공청산 투쟁의 일환으로 「전두환·이순자 부부 체포결사대」를 만들어 연일 대규모시위를 주도, 전씨의 백담사행에 큰 영향을 미쳐 전대협이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시기로 평가된다.
오군은 지난달 초 만기 출소한 뒤 최근 고대학생들이 마련한 환영대회에 참석했으나 현재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전대협의 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는 89년5월 출범한 임종석군(26·한양대 학생회장)의 3기.
임군은 출범하자마자 평양축전 참가를 천명하는 등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전개, 캠퍼스를 평양시가지로 꾸미는 등 「평양바람」을 일으켰으며 강령과 규약을 개정하고 정책위원회를 신설하여 전대협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임군은 임수경양의 평축 파견으로 곧바로 수배됐으나 수사망을 피해 10개월 동안 신출귀몰하면서 「망명 전대협」을 이끌어 「임길동」「한국판 맥가이버」란 별명을 얻었다.
임군은 가발과 안경으로 여장을 한 채 수사관을 따돌리기도 했으며 89년7월 임양 평축 참가발표 후에는 대회장인 한양대를 포위한 8천여명의 경찰벽을 뚫고 백주의 탈주극을 연출하는 등 지금까지도 신화적 존재(?)로 운동권학생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89년12월 경희대에서 한 방송사와 인터뷰하려다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힌 임군은 검거 전까지 서울 개포·잠실 등의 독신아파트에 은신하기도 했으며 기소당시 국가보안법위반 24회 등 40개의 범죄사실을 기록하는 등 화제를 뿌렸다.
90년5월 5년형이 선고돼 아직 수감생활을 하고있다.
4기 송갑석군(26·전남대 학생회장)은 90년2월 광주민주화운동 10주기의 상징성이 고려돼 지방학생으로선 처음으로 전대협 의장을 맡았다.
송군은 민자당 해체투쟁을 주도하고 범민족대회에 적극 참여하는 등 정부의 정책에 맞섰지만 운동의 중심축이 서울에 있었던 관계로 전체학생운동권을 지도하는데 한계가 드러나면서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은신처인 서울 월계동의 한 아파트에서 경호원인 전남대생 2명과 함께 있다 안기부원과 격투 끝에 붙잡혔던 송군은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5기 의장 김종식군(24·한대 학생회장) 은 강경대군 치사사건이후 재야와 함께 대정부공세를 펼쳤으며 임수경양에 이어 성용승군(22·건대4)등 2명을 평양에 파견했었다.
지난해 7월 붙잡힌 김군은 올 1월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같은 파란의 과정에서 전대협은 80년대 후반의 국내 민주발전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와 함께 운동권에 이끌린 과격투쟁에 불안의 시각이 엇갈려 왔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학생운동의 퇴조, 탈 이데올로기 시대에 맞춰 건전한 학생운동세력으로 전대협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침묵하는 다수학생들의 호응을 받는 새로운 활동방향 모색이 시급한 과제로 남아있다. <오영환·홍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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