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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고독 즐기는 ‘글루미族’의 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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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08면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커피잔이 아니라 유행이자 브랜드다. 사진 신동연 기자 

로렌 와이스버거의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성질 고약한 상사 미란다는 아침마다 스타벅스 커피를 찾는다. 덕분에 그녀의 비서 앤드리아는 테이크 아웃 커피를 배달하느라 부산하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파크 라이프』에 등장하는 인물은 스타벅스에 드나드는 여자들을 보면 혐오스러운 자신을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그 매장에 앉아 커피나 뭐 그런 걸 마시고 있으면 계속해서 여자 손님이 들어오잖아? 그게 전부 나로 보인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 혐오지” 라고 말이다.

新문학기행-스타벅스

된장녀 논란의 한가운데 스타벅스가 있었듯이, 스타벅스는 고유명사라기보다 일종의 현상에 가깝다. 스타벅스에 간다는 것은 커피를 마신다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는 과정이다. 한국문학 안에 묘사된 스타벅스의 형편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프라프치노’를 손에 들고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활보하는 소녀, 정이현의 ‘순수’에 등장하는 16세 고등학생처럼 말이다.

커피보다는 이미지

국립대 교수인 아버지와 허영기 다분한 엄마 사이에서 큰 소녀는 다 큰 어른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폴로 랄프 로렌의 니트 스웨터와 버버리 체크 스커트, 그리고 무릎양말과 진퉁 DKNY 스니커즈”를 신고 압구정동으로 향하는 소녀. 소비가 넘쳐나고 사치가 만연한 그곳에서 소녀는 “명품관 1층에서 나비 모양 머리핀 두 개를 골라” 친구 엄마의 카드로 계산하고 스타벅스로 향한다. 소녀는 스타벅스에 가서 프라프치노를 마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커피 전문점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와 “스타벅스에 가서 프라프치노를 마셨다”라는 서술 사이에 놓인 간극이다. 로데오 거리를 산책하는 그녀들은 커피가 아니라 ‘카페모카’ ‘프라프치노’ ‘카라멜마끼아또’를 마신다. 그 뉘앙스의 차이는 신발을 신지 않고 ‘DKNY 스니커즈’를 신는 차이와 유사하다. 압구정동의 소녀들은 커피를 마시고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이미지를 소모하고 추구한다. 그녀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단순한 커피잔이 아니라 유행이자 브랜드인 셈이다.

알다시피 커피는 실용적인 음료라기보다 사교적인 매개체에 가깝다. 18세기 지식인 사회가 커피 하우스와 카페를 통해 형성ㆍ유지됐던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1990년대, 통유리 너머로 자신을 전시하는 커피 전문점의 출현은 새로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타벅스는 통유리창 너머 커피 전문점으로 대표되었던 1990년대적 패러다임의 전환과 맞먹는다. 자신을 전시하는 나르시시즘에서 세련된 고독을 연출하는 자의적 우울로의 전회. 새로운 고독의 발견 말이다. 혼자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되뇌는 ‘은수’처럼, 스타벅스에는 세련된 고독을 찾아 온 ‘글루미족’들이 있다.

길 건너 스타벅스에 들어가 카페모카를 주문한다. 문득 웃음이 난다. 1500원짜리 떡볶이로 저녁을 때운 주제에 후식으로 두 배가 넘는 가격의 커피를 마시다니. 통장 잔고를 헤아려보려다 그만둔다. 창가 자리가 나를 위해 운 좋게 비어 있을 리 없다. 매장 한 구석 작은 원형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는다. 쟁반 위에, 머그잔이 달랑 하나뿐이다. 혼자라는 사실이 또렷하게 실감난다.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새로운 고독의 발견

실상 스타벅스는 둘보다도 혼자 들르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해, 혼자서 커피를 마시거나 샌드위치를 먹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장소가 스타벅스다. 혼자 있지만 그 혼자임이 커피와 함께라 세련됨으로 포장될 수 있는 공간, 스타벅스는 고독을 연출하고 싶은 글루미족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아니 그 욕망을 자극한다. 배타적 우월감으로서 우울함을 즐기면서도 세련된 이기주의자라는 이미지를 제공해 주니 말이다.

1990년대 소설 안에서 커피 전문점이라는 공간은 만남과 약속, 대화의 장소로 제공되었다. 그러니까 윤대녕이나 은희경, 김영하의 소설 속에서 커피 전문점은 혼자가 아닌 둘 혹은 여럿이 들르는 장소였던 셈이다. 윤대녕의 작품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에서 주인공은 매주 토요일 오후 세 시, ‘전함 포템킨’이라는 카페로 가 그 주인과 대화를 나눈다. 은희경의 소설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에서 두 연인은 늘 같은 카페에서 만나 데이트를 나누다 그 카페에서 헤어지기까지 한다. 매력적인 여자 ‘미미’를 만난 김영하의 소설 속 대학로 커피 전문점도 다르지 않다(『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혼자 있는 공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장소가 곧 커피 전문점이었던 셈이다. 이를테면 공지영의 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 등장하는 두 친구 지희와 홍이처럼 말이다.

지희는 냉정한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게 진실일 거야. 그러니까 홍아, 이젠 잊어.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잖아?”
지희가 약을 처방하는 의사처럼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희야, 내가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그때 나는 대학로 스타벅스 한구석에서 울기 시작했을 것이다.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편하면서도 배타적인 곳

준고라는 일본인을 사랑했던 여자 ‘홍이’는 그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낸다. 이 혼란한 마음을 ‘최홍’은 심리학을 전공하는 친구 지희를 만나 나눈다. 공지영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스타벅스라는 배경은 동시대인들이 스타벅스를 어떤 장소로 받아들이는지 잘 보여준다. 스타벅스는 어두운 지하 다방처럼 음습하고 초췌한 내면을 쏟아놓는 장소도, 그렇다고 혈기 왕성한 대학생들이 모여 커피를 마신다는 핑계로 포르노그래피를 단체 관람하는 장소도 아니다. 밀사와 만나 음모를 나누던 장소는 더더욱 아니고, 친지의 소개로 만나 어색한 호구조사를 해야 할 ‘선’ 자리도 아니다. 스타벅스에서 만나면 소개팅이지만 ‘신라호텔 라운지’에서 만나면 맞선이 되는 호명의 전이는 이를 잘 보여준다. 스타벅스는 말쑥한 정장을 빼입어야 어울릴 법한 호텔 로비 라운지보다 편하고, 쌍화차가 놓인 다방이나 커피 전문점보다 배타적이다. 이제 사람들은 마로니에 공원이나 강남역 7번 출구가 아닌 인사동 스타벅스, 대학로 스타벅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다.

짝사랑으로 세월을 죽이고 있는 노총각인 나는 내내 침묵했다. 그녀가 어쩌면 팀장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게 된 것은 어느 봄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던 참이었다. 한미연씨는 생머리가 잘 어울려. 커피를 마시던 팀장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귓불이, 목덜미가 붉게 물드는 것을. (김경욱,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

대학생들의 만남의 장소로도 활용되지만 실상 스타벅스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 중 하나는 테헤란로나 광화문처럼 사무실이 밀집한 대도시 중심부다. 분위기를 위해 커피를 마신다기보다 그들은 각성을 위해, 중독된 몸의 욕구를 달래기 위해 진한 커피를 들이붓는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인들에게 스타벅스 커피는 점심시간의 외출을 조금쯤 화려하게 해줄 약간의 사치로 활용된다. 하루에 네 잔 정도 마시는 믹스 커피와는 다른 점심의 여유 말이다. 2000년 이후 소설 속에 갑자기 등장한 스타벅스는 우리의 일상사에서 그것이 어떤 위치와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패션으로서의 스타벅스, 이는 새로운 개인들의 탄생을 고지하는 아이콘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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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씨는 2005년 신춘문예 3관왕(문학평론과 영화평론)을 차지한 비평가이자 계간지 『작가세계』와 『쿨투라』 편집위원으로 최근 평론집 『오이디푸스의 숲』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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