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방문」 가슴앓이 최원식 이북도민협회장(일요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갑산 공기 한번 마셔봤으면…”/백명뿐이니 망향 갈증 더해/남북이 함께 살길은 대화뿐/「잠깐 피신」이 40년 이산… 생사확인 마지막 소원
요즘 땅을 헛짚으며 걷는 이산가족들이 많다. 「8·15고향방문단」 생각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40년전의 고향이 사무칠듯 피어난다. 피붙이들의 모습도 손에 잡힐듯 선하다.
부드러운 흙을 밟고 마을 한가운데를 뜀박질하다 넘어지면 어느덧 꿈.
속절없는 담배연기 한모금으로 텅빈 가슴을 채울 수 밖에 없다.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상처가 다시 아려오기 때문이다.
1천만 이산가족중 겨우 1백명.
최원식이북도민협회장(69·한국교육출판대표)은 바로 그런 이산가족들의 한과 기대를 들어주고 위로하느라 더욱 바쁘다.
최 회장으로부터 요즘 이산가족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꿈도 못꿀 경쟁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 숨어있는 기대는 어쩔 수가 없다.
­남북이 오랜만에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합의해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 저한테 오는 전화가 부쩍 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방문단에 포함되느냐」 「이번에 못가면 다시는 갈 수 없으니 나를 꼭 포함시켜 달라」는 얘기들이지요.
전에는 남북이 서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원망스럽고 답답했는데 정작 방문단이 구성되고 나니 이젠 너무 수가 적어 안타깝군요.
목이 타 마신 물 한 모금이 오히려 갈증을 더해주고 있는 셈이지요.
­요즘 이산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상봉단이 구성된다니까 요즘 이북5도청이나 도민회 사무실에는 이산가족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지고 있습니다.
도민회에서 모임같은 것을 만들면 나이든 사람끼리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며 상봉단이며 고향얘기를 하다간 그냥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보기가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생전에 고향한번 못가보고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 가슴이 아픕니다.
요즘 병원에 문병을 가보면 「죽어도 화장하지 말고 꼭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북에 처자를 두고 왔는데 자기가 죽고나서 아무 흔적도 없으면 막상 통일이 됐을 때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거지요.
­정부에 맡기는 대신 스스로 가족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교포들이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다음 북에 가서 가족 상봉은 물론 서신왕래를 하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국 연길에 사는 교포를 통해 생사도 확인하고 더러는 중국에서 상봉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손가락으로 셀 정도지요.
그러나 요즘은 북한의 재미교포 방북금지조치로 소강상태입니다.
­이산가족 현황은 어떻게 파악되고 있습니까.
▲이산가족들이 가호적을 만들때인 58년 당시 4백57만명이 등록했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인구가 2천2백만명이었는데 지금은 4천5백만명이 됐으니 1천만이산가족이 있는 셈이지요.
특히 6·25때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는데 당시 50대가 15%,40대가 20%,30대가 50%를 각각 차지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당시 50세였던 사람들은 지금 거의 다 눈을 감았고 40대였던 사람들도 벌써 망백이 다 됐습니다. 그분들이나마 고향을 보고 가야 할텐데….
­요즘 북한의 태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남북합의서가 채택됐을때만 해도 실향민들은 통일이 금방 되는 것처럼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기뻐들 했지요. 국제정세도 그렇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아 더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합의서가 채택된 뒤에도 북한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런 기대도 부질없는 것같습니다.
한쪽으로 회담을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국군을 가장,침투해 오는 걸 보면 북한이 하나도 변한게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지요.
­혹시 북한에 바라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북한이 자유왕래를 겁내고 있으니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두고운 가족들의 생사만 알 수 있어도 여한이 없겠고 서신왕래라도 제대로 됐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이산가족들의 반공정서가 이해는 되지만 시대에 맞추어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이산가족들은 1주일에 한번씩 도민회 주최로 국제정세 설명회를 갖거나 이북출신이 만든 동화연구소같은 곳을 중심으로 아침마다 조찬강연회를 가지면서 국제적 흐름들을 접하려고 합니다.
강연회같은 데서는 독일대사라든지,이북 귀순자를 초청해 강연을 듣곤 하는데 물론 자연스럽게 「반공」이 주제가 되지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북한에 속아서는 안되지만 남북이 대화해야 하고 서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시대의 변화는 의식하고 있지요.
­최 회장 자신도 이산가족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24세 되던 해 1·4후퇴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님·형수님·조카를 남겨두고 고향인 갑산을 떠나 잠깐 피신한다는게 그만 이렇게 됐습니다.
저희들은 4형제였습니다만 둘째 형님과 동생은 그전부터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제가 피난하는 바람에 형제들과 부모님이 이산가족이 됐지요. 아버님이 살아계신다면 1백10세가 됩니다.
아버님의 나이를 기억해내며 담배를 꺼내 피우는 최 회장의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달려가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임진강에 나가 끊어오르는 감정과 한을 삭이기를 벌써 40년.
고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최 회장의 얼굴에서 피붙이와의 생이별로 돋아난 통한의 불꽃같은 것은 이제 사라진듯 보였다.
이제 남은 소원이라면 나이 많은 이산가족들이 죽기전에 평양이라도 가서 고향쪽 공기를 한번이라도 마셔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마음뿐이다.<안성규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