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추적] 건교부 직원 10여 명 ‘검은 돈’ 받아 유흥비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호 03면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직원이 민간업체들로부터 수억원의 뇌물을 받고 이 중 수천만원을 건설교통부 모 공무원에게 상납했습니다. 또 직원들이 허위로 출장비를 올려 공금을 횡령했어요.”

建技硏, 업체서 받은 뇌물에 출장비까지 횡령해 정기 상납

지난 9일 기자에게 이런 제보가 들어왔다.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현재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이라고도 했다. ‘사실일까?’ 기자는 우선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하 건기연)이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봤다. 건설기술의 연구개발과 보급을 담당하는 정부출연 공공기관으로 건교부에서 프로젝트 등 일감을 수주하고 있다.
기자는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정공법으로 부딪쳐보기로 했다. 우선 건기연에 전화를 걸었다.

“감사원 감사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출장비 횡령도 일부 사실이고요.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건교부 측도 “감사를 받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고 했다. 해당 공무원이 현재 ‘대기발령 중’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내부 고발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건기연에 근무했던 전 연구원 Q씨. 감사원이 감사에 착수하게 한 사람이었다.

“지난해 제가 있던 부서의 직원들이 허위로 출장비를 꾸며 올린다는 사실을 (연구원 내부의) 감사실에 알렸어요. 그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죠.”

연구원은 자체 감사에서 특정 부서에만 국한된 문제로 보고 관련 직원들을 가볍게 징계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Q씨는 다른 부서로 전출됐다. 하지만 옮긴 부서에서도 허위 출장비 관행은 여전했다. Q씨는 고민 끝에 시민단체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에 알렸다. 이것이 지난해 말 국가청렴위원회 조사와 감사원 감사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에서 중간평가를 전후해 건교부 담당 공무원에게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까지도…”

Q씨의 입을 통해 상납의 고리가 뿌리째 드러났다. 그는 “프로젝트 평가가 D 이하로 나오면 추가 수주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건교부 담당 공무원에게 돈을 건네왔다”고 했다. “프로젝트와 관계없이 명절이나 연말에도 수시로 돈을 상납해왔다”고 덧붙였다.

“저도 공무원 계좌로 무통장 입금하는 심부름을 여러 차례 했어요. 상납 액수가 부족하자 허위로 올린 출장비에서 충당하는 것도 봤습니다.”

Q씨는 “심부름을 거절하자 조직에서 ‘왕따’와 심한 언어폭력을 당했다”며 “이 일로 몇 달 동안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계약직 연구원 신분이었던 그는 지난해 계약연장이 되지 않아 퇴직한 상태다. 기자는 Q씨의 구체적 증언과 감사원 확인 취재를 통해 횡령과 뇌물 상납의 구체적인 내용과 액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감사 결과, 건기연 소속 다른 연구원인 A씨는 2000년부터 최근까지 포클레인ㆍ불도저 등 건설기계의 성능과 안정성을 승인하는 업무를 하면서 관련 업체들로부터 총 1억7600만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이 중 4000만원을 건교부 공무원에게 다시 상납해왔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문제의 4000만원은 한 사람의 호주머니에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건교부 직원 10여 명의 부부동반 바다낚시 경비와 체육행사비, 노래방 유흥비 등으로 쓰였다. 건기연의 출장비 횡령에는 300명 넘는 직원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 특별조사본부는 “중앙부처 공무원이 어떤 돈인 줄 알면서도 산하기관에서 수년간 받아왔다는 점이 개탄스럽다”며 “관행적 ‘떡값’ 수수 등에 대해 집중 감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그리고 업체 간의 상납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 다수가 연루돼 있다는 점에서 내부 문화가 썩을 대로 썩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경찰대 이웅혁 교수는 “상납이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종적으로, 그리고 횡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며 “정부가 부정부패 척결을 외쳐왔음에도 내부의 공생관계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미국에선 상납 범죄가 50년 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며 ‘전형적인 후진국형 부패’라고 요약했다.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의 이지문 대표는 “공공기관은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고 고발 내용을 엄정히 감사할 수 있는 자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제시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