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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으로 살다 간 마오의 차남 안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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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26면

1960년대 초 마오쩌둥 일가의 모습. 왼쪽부터 안칭, 장사오린, 마오쩌둥, 류쑹린, 사오화.

마오쩌둥은 세 번 결혼했는데 세 명의 부인 모두 불우했다. 첫째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는 총살당했고, 둘째부인 허쯔전(賀子珍)은 강제로 이혼당한 채 마오 생전엔 베이징 출입도 못했다. 장칭(江靑)의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셋째부인 장칭도 감옥에서 자살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③ 소시민으로 살다 간 마오의 차남 안칭

양카이후이는 마오의 무장 폭동 실패 후 아들 셋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으나 체포돼 숨졌다. 당시 안잉(岸英)이 8세, 안칭(岸靑)이 6세, 안룽(岸龍)은 3세였다. 양의 사망 후 공산당 비밀조직은 삼형제를 상하이로 빼내, 비밀당원 둥젠우(董健吾)가 성공회 신부 신분을 이용해 운영하던 다퉁(大同)유치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안룽은 병사했고, 둘째 안칭은 거리에서 경찰에게 얻어맞아 머리를 다쳤다. 1933년 상하이 공산당 조직이 와해돼 유치원도 해산됐다. 이때부터 둥젠우의 전 부인이 형제를 양육했다.

36년, 홍색(紅色) 신부로 알려진 둥젠우는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에게 접근해 자신의 아들과 친구의 아들 두 명을 프랑스에 보내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장쉐량은 10만 프랑이라는 돈을 지원했고, 마오의 두 아들은 파리를 거쳐 소련으로 갈 수 있었다. 장쉐량은 영문도 모른 채 마오의 두 아들을 구해준 셈이다.

안잉에 비해 안칭의 소련 생활은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다친 머리를 치료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47년, 안칭은 형보다 1년 늦게 귀국해 다롄(大連)의 요양원에 있다가 중국 건국 이후엔 군사과학원과 중앙선전부에서 연구와 러시아 서적 번역에 종사했다. 안잉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60년, 안칭은 장원추(張文秋)의 차녀 사오화(邵華)와 결혼했다. 장원추에겐 첫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잉의 부인 류쑹린(劉松林)이다. 그리고 둘째남편과의 사이에서 사오화와 장사오린(張少林) 두 딸을 두었다. 장의 딸 둘이 마오쩌둥 며느리가 된 셈이다. 마오는 훗날 류쑹린을 재혼시키고 수양딸로 삼았다. 며칠 전 안칭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삶이었다. 태자당(太子黨)이라는 괴상한 용어로 불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안칭에겐 아무리 생각해도 붙이기에 적당한 용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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