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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의 축’과도 대화로‘카우보이 외교’ 끝내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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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02면

체니 VS 라이스 2005년 10월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잘메이 할릴자드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를 만났을 때 배석한 딕 체니 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라이스는 지난 2월 체니가 해외 출장 중이었을 때 ‘악의 축’ 이란과의 대화 방침을 밝혔다. [AFP특약] 

2월 27일 미 상원 세출위원회.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새 대외정책 구상을 밝혔다. “이란·시리아도 포함한 이라크 주변국들과의 장관급 회담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은 미국에 ‘악의 축’이고, 시리아는 이라크 반군세력을 지원하는 ‘적’이다. 이날은 딕 체니 부통령이 해외 출장 중이었다. 일본·호주·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렀다. 체니가 말한 “악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물리칠 뿐이다”는 부시 행정부 외교의 경문(經文)이었다. 라이스는 체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를 뒤집었다. 3월 10일 이라크 안보회의에서 미·이란 접촉이 이뤄졌고, 장관급 회담은 이달 중 열릴 전망이다.

라이스 국무, 부시 대통령의 귀를 잡다 #대북 협상, 부처 간 협의 없이 부시에 직보…체니 해외 출장 중 “이란과 회담” 밝혀

이보다 보름 앞선 2월 13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6자회담 합의문을 승인한다. 북한과 관계정상화 교섭을 개시하고 북한이 핵시설을 폐쇄하면 6개국이 중유 5만t을 제공하는 등의 비핵화 초기 조치다. 크리스토퍼 힐 수석대표(국무부 차관보)는 “나는 라이스 장관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며 “라이스 장관과는 매일 통화했고, 마지막 날엔 새벽 4시15분에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의회 청문회). 부시 1기 행정부 때 열린 6자회담에서 번번이 시비를 걸었던 부통령실·국방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다. 이 합의의 초석이 된 1월의 북·미 베를린 양자회담 결과는 부시가 라이스와의 전화로 승인했다. 당시 라이스는 중동을 순방한 뒤 귀로에 베를린을 경유했다. 대통령과 국무장관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인사는 없었다(뉴욕 타임스). 부시 1기 때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체니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견제로 운신의 폭이 좁았다. 2004년 2월의 2차 6자회담 때 체니는 대표단에 직접 전화를 걸어 협상에 개입하기도 했다(워싱턴 포스트).

2·13 합의나 미·이란 대화는 미 외교정책의 일대 전환이다. 불량 국가를 상대로 한 ‘2불(不) 1유(有) 독트린’이 무너졌다. ‘악의 축과 대화하지 않는다’ ‘나쁜 행동에 보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깼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삼아온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있다’도 가물가물해졌다. 체니가 중심에 있었던 정책들이다. ‘카우보이 외교의 종언’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뜨는 라이스 부시 대통령의 회견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라이스 국무장관. 그의 영향력 증대는 딕 체니 부통령 측근들의 잇따른 퇴진과도 맞물려 있다. [AP특약]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 정책은 하지 않는다)’ 불문율도 깨졌다. 2·13 합의는 북한의 핵동결과 보상을 맞바꾼 북·미 제네바 합의의 재판(再版)이다. 양자냐 다자냐의 차이일 뿐이다.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축으로 한 라이스의 대(對)중동 정책 구상은 클린턴 정책을 빼닮았다. 행정부를 떠난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배신’이란 낱말을 입에 담고 있다. 국제 협조주의와 현실주의가 부시 1기를 지배해온 일방주의와 이상주의를 잠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변화는 부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내 파워게임의 산물이기도 하다. 대립 축은 체니와 라이스다. 지난해 11월 의회 중간선거는 세력균형 붕괴의 분수령이었다. 이라크전과 전후 관리를 심판한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이 참패하면서 체니의 입지는 좁아졌다. 그는 이라크전의 실질적 사령탑이다. 포드 행정부 이래 후견인이던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사임했다. 루이스 리비 전 비서실장의 ‘리크 게이트(Leak Gate)’● 재판도 그를 궁지로 내몰았다.

그 공백을 메우면서 부시의 귀를 잡은 것이 라이스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라이스는 대통령의 신뢰를 바탕으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수정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3월 7일자). 라이스는 럼즈펠드 후임인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친하다. 둘 다 현실주의 노선을 대변하는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문하생이다.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은 라이스가 국가안보보좌관 때 부보좌관이었다. 국무부 서열 2, 3위인 존 네그로폰테 부장관, 니컬러스 번스 정무차관을 축으로 한 직업외교관은 라이스의 버팀목이다. 여기에다 협상파에 제동을 걸어온 비확산 전문가 로버트 조셉 국무부 차관(국제안보 및 군축)과 네오콘 존 볼턴 유엔대사(전 국무부 차관)도 물러났다.

부시와 라이스의 친분도 빼놓을 수 없다. 라이스는 부시와 가장 가까운 인사 중 한 명이자 가장 충성스러운 정책 자문가다. 국가안보보좌관 때는 부시를 하루에 7∼8번 만났고, 4∼6시간 동안 같이 있었던 날도 많았다. 그녀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엔 그녀의 전용 방이 있다. 그녀는 일요일 저녁 부시 가족과 거의 정기적으로 식사한다. 둘은 스포츠를 사랑한다. (『Running the world』, 데이비드 로스코프)

라이스는 최근 국무부 고문에 네오콘을 기용했다. 이라크전 주창자 중 한 명인 엘리엇 코언 존스홉킨스대 교수다. 조지 부시 대통령 때 NSC에서 함께 근무했던 필립 젤리코 고문을 떠나보내고서다. 정책전환에 불만을 품은 행정부 내 네오콘을 달래려는 시도라는 풀이다(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버거운 상대를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권력게임에서 이기고 있을 때나 가능한 법이다. 라이스는 지난 6년 동안의 강온파 간 대립과 정책 혼선에 종지부를 찍고 현실주의 노선을 안착시킬 수 있을까. 새 대북·대중동 정책은 최대 시험대가 되고 있다. 라이스가 두 문제에서 협상을 재촉하고, 조기 성과를 강조하는 것은 네오콘의 반격을 저울질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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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y word 리크 게이트

중앙정보국(CIA) 소속 스파이 신원을 백악관 수뇌부 쪽에서 고의로 언론에 흘린 사건. 2002년 이라크의 무기급 농축 우라늄 구입 문제를 조사했던 조셉 윌슨 전 이라크 대리대사가 2003년 이라크전 이후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의 위협을 과장하기 위해 관련 정보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이 윌슨을 비난하는 칼럼을 쓰면서 윌슨의 부인 발레리 플레임이 CIA 스파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CIA 스파이 이름 공개는 현행법 위반 사항. 특별검사가 임명돼 정보 누출을 조사했고, 결국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인 리비가 지난달 유죄 평결을 받았다. 최지영 기자

●라이스는
1981년 스탠퍼드대 조교수
87년 합참 전략팩정책자문관
89년 NSC소련 ㆍ동유럽 국장
93년 스탠퍼드대 교무처장
99년 부시 대통령 선거운동 합류
2001년 국가안보보좌관
2005년 국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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