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마다 막후 역할한 TK대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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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5면

한국 현대사에는 TK(대구·경북)라는 거대 산맥이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 두 개만 고르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신현확 전 국무총리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선 설명이 필요 없다. 신 전 총리는 1980년 전두환 장군만 없었더라면 대통령이 됐을 거라는 분석이 많다. 신씨는 왜 그런 반열에 올라 있을까. 단순한 답이지만 능력과 인품이다.

한국정치사 속의 신현확

신동(神童)이었던 신씨는 23세에 고시에 합격했고, 39세에 요직 중에 요직인 부흥부 장관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를 놓칠 리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를 보사부 장관과 경제부총리에 앉혔는데, 박 대통령이 더 살았더라면 총리를 시켰을 것이다.

그 시대,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또 있었다. 그런데 신씨는 인품도 훌륭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하고 단호했다. 신씨의 친구 조카이자 경북고 출신 전직 언론인인 서성동씨는 “신 전 총리가 반세기 동안 TK 대부였던 것은 다른 이들을 따르게 만드는 인품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도 그런 인물을 놓칠 리 없었다. 이 회장은 경남 의령 출신이지만 대구에서 사업을 일으켜 신씨에 대한 TK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이 회장은 신씨를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해 후계자 이건희씨를 위한 병풍 역할을 맡겼다. 그는 이를 잘 수행해냈고, 삼성그룹 승계작업은 순조로웠다.

봉우리는 봉우리를 알아본다. 신씨는 이승만 정권에서 장관을 해서 3·15 부정선거 연루 혐의로 2년7개월간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경북 달성 출신인 김성곤 전 쌍용 회장은 신씨가 감옥에서 나온 후 같이 손을 잡았다. 신씨는 쌍용상회 사장과 국민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전두환 장군은 실력자였지만 신현확이라는 봉우리를 넘지 못했다. 전 장군은 경남 합천 출신이지만 합천이 정서적으로는 경북이고 자신도 학교를 대구에서 나와 TK 정서를 잘 알고 있었다. 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도 겸직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신현확 총리는 민간인이 맡아야 한다고 반대했다. 그래도 전 사령관은 신 총리를 제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도 신 총리가 TK 그룹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씨는 한국 현대사의 진실규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2·12 군사반란을 수사하는 검찰에 가장 중요한 증언을 한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것을 마지못해 결재하면서 문서에 ‘새벽 05시 10분’이라고 적어놓았다. 나중에 신 총리는 최 대통령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다. 최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신 전 총리는 채동욱 검사에게 이런 사실을 증언하며 “최 대통령은 연행이 적법하다고 생각해서 재가한 것이 아니라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후재가를 한 것이며, 이를 알리려고 시간을 적어놓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부산고검 차장을 맡고 있는 채 검사는 “신군부의 12·12 행위에 대한 신 전 총리의 노기(怒氣)가 얼굴에서 읽혀졌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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