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받고, 차별을 숨기고, 새 희망을 품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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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12면

“내가 나타나면 갑자기 어색하게 조용해지곤 했다. 그 말을 아끼는 듯한 쌀쌀함, 누가 대놓고 뭐란 적은 없지만, 오래 뭉그적거릴 만큼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창래, 『제스처 라이프』에서.

영화 속에 등장한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초상

외국에 살며 차별 받는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문제가 최근 영화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런 문제를 가장 풍부하게 제기하는 곳은 역시 일본이다. 지난해 개봉돼 영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양영희 감독의 ‘디어 평양’, 그리고 곧 개봉을 앞둔 김명준 감독의 ‘우리 학교’는 모두 일본에서 차별 받는 재일 한국인(조선인)들의 갈등을 다룬다. 이들은 일본인들에게 차별 받고 사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남한)사람들에게서도 차별 받는다. 사실 우리들에겐 재일동포들이, 또 한국인들까지 일본인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차별을 받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서 이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좀 희화(戱化)되어 전해졌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유명한 일본인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의 ‘고 GO’(2001)가 재일교포 2세의 성장기를 그리면서 최근의 디아스포라 붐을 예고했는데, 영화는 재일 조선인의 차별을 숨긴 낭만적인 코미디로 머물고 말았다.

이즈쓰 가즈유키 감독의 ‘박치기’(2004)도 재일 조선인들을 다루곤 있지만, 역시 이들의 존재는 표피적인 수준에서 서술되는 데 그쳤다. 영화는 차별의 존재조건을 고민하는 재일 조선인들보다는, 덜떨어진 일본인들을 혼내주는 멋진 조선학교 학생들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일본인들을 때려눕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멋있는 줄은 몰라도, 외국인에 의해 왜곡된 채 표현된 이런 종류의 영화는 사실 재일 조선인을 이해하는 데는 독이 되는 환상이다.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문제는 동포 감독들의 영화들이 발표되며 진정성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첫 신호탄은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2004)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오사카를 배경으로, 심지어 가족까지 착취 대상으로 삼는 폭력적인 남자의 일생을 그린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피와 뼈’를 짜내는 일그러진 그의 모습은 식민주의자 일본에 의해 영혼이 찢겨진 재일 한국인의 초상이나 다름없다.

디아스포라라는 주제에서 보자면 2006년은 아주 풍성한 해다.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동시에 수작들이 제작돼 발표됐기 때문이다. 먼저 중국동포 감독 장률의 ‘망종’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겉도는 한 중국동포 여성과 그의 어린 아들을 그린다. 고향을 잃어버린 유랑민으로서의 중국동포 여성은 중국인은 물론 중국에 정착한 다른 조선인에게서도 상처를 받는다. 가슴에 멍이 든 여성의 심정을 푸른색 주조의 화면으로 표현하는 등 형식적인 면에서도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장률 감독은 올해, 몽골에 흘러들어간 탈북자 모자(母子)의 이야기를 그린 신작 ‘히야쯔가르’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는 성적을 내기도 했다.

재일동포 여성감독 양영희의 ‘디어 평양’은 무려 10여 년에 걸쳐 자신의 가족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역시 오사카에 거주하는 감독은 조총련 간부를 지낸 아버지의 모습을 담으며, 해방 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의 시대적 갈등을 다룬다. 아들 셋을 북으로 보낸 민족주의자 아버지와 일본의 신세대에 속하는 딸 사이의 반목과 화해를 다룬 사적인 가족사는 곧 바로 재일동포의 생생한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개봉을 앞둔 김명준 감독의 ‘우리 학교’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는데,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한국인 감독이 다뤘다는 점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이제 우리도 외국에 사는 또 다른 우리들의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감독은 홋카이도에 있는 조선인학교에서 약 3년간 그들과 함께 살며 학생ㆍ교사들의 일상을 세세하게 담았다. 그들의 한국어 배우기, 축구시합, 운동회, 조국(북한) 방문, 졸업식 등에서 보이는 동족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물론이고, 약간은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 감정, 그리고 친북적인 성향까지 가감 없이 담아내고 있다. “조선사람인 게 싫었습니다. 차라리 일본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학생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성장의 한 단계를 넘어가는 모습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벅찬 감정을 전달한다.

재미 한국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올해 초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어 주목을 받은 김진아 감독의 ‘네버 포에버’가 있다. 한국인 변호사와 사는 백인여성이 아기를 갖기 위해 불법체류 중인 다른 한국인 남자와 관계를 맺는데, 그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회적 차별을 넘어서는 인종 간의 갈등이 가려져 있어, 디아스포라의 소외감까지 표현해내는 데는 큰 아쉬움을 남겼다. 속된 말로, 출세하면 백인과의 관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발상이다.

차별과 억압의 상징적 존재인 디아스포라, 그들의 모습이 미화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솔직하게 그려질 때 우리는 부조리가 개선된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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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씨는 미술과 몸을 섞은 영화 이야기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로 이름이 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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