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낙선의원 94명/씁쓸한 이사채비/의원회관뒤로 제갈길찾기 부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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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YS지지 나서도 당정개편때 찬밥 여/지역구 유지비 조달대책없어 한숨 야
22일 오후 여의도 국회의사당 남쪽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8층짜리 의원회관 곳곳에선 한창 이삿짐을 꾸리느라 부산하다.
5월29일이면 4년 임기가 만료되는 13대 국회의원들이 사무실을 나가거나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4대 선거에서 재당선돼 사무실을 바꾸는 의원들이야 별 문제가 없지만 낙선의원들은 물리적 공간을 옮기는 이상의 생활변화가 뒤따른다.
이들은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낙선하면 사람도 아니다』는 얘기를 실감나게 느꼈거나 느끼게 될 것이다.
13대 지역구의원 2백37명중 낙선자는 민자당 64명,민주당 10명,국민당 6명,기타 14명 등 모두 94명이다.
대부분 낙선의원들은 15대 재기를 다지며 지역구를 고수할 뜻을 비치고 있지만 주변의 시선이 전과같지 못한 것을 느끼고 있다.
민자당의 경우 상당수 의원들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어느 한편을 들어 「새로운 정치활로」를 모색했지만 아무래도 원내 인사들에 비하면 핸디캡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김영삼후보쪽에 줄을 섰던 이치호·정종택(3선)·김종기(4선)의원 등은 낙선자중 YS지지자들을 규합해 「13회」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이들은 낙선후에도 조금도 낙담의 빛을 드러내지 않고 김 후보 추대위에 가장 먼저 참여해 YS대통령만들기에 적극 뛰어들었다. 4선의 남재희의원도 서울 지역 조직책으로서 추대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논공행상 성격의 당정개편자리에 이들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아 낙선의 비애를 느끼고 있다.
3선의 오유방·김현욱의원은 이종찬의원쪽을 선택해 두번의 패배를 맛봐야 했다. 외무통일 위원장이었던 김 의원은 회관 사무실에 근사하게 걸려있는 레이건·부시 미 대통령 등과 함께 직은 대형사진을 떼어내 새로 낼 서울 사무실로 옮기고 있었다.
공천탈락과 낙선의 2중고배를 마셨던 오한구 전 내무위원장(3선)은 지역에 사무실을 그대로 두고 자신이 한때 회장으로 있었던 대한산악회사무실 한칸을 무료로 빌려 나가면서 권토중래를 다짐하고 있다. 오 의원은 운전기사만 남겨두고 보좌관과 비서관을 다른 곳으로 내보냈으며 여비서는 친분있는 정호용의원 당선자에게 말해 대신 채용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날 통합 민주당의 원내총무로 화려한 정치생활을 했던 김정길의원은 13대 국회 마지막 세비를 받았다. 총 4백26만4천4백40원. 여느때와 같이 8식구 생활비 3백만원을 떼어주고 나면 남는 것은 「동전소리」 뿐이다.
내달부터 운영하게 될 여의도 사무실 운영비 3백만원은 물론 지역구 관리비가 최소한 2백만원은 유지비로 나가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처지인 노무현의원은 변호사 사무실이라도 재개업하면 일정 수입이 보장되지만 김 의원은 그렇지도 못하다.
그가 말하는 생활의 변화는 이러하다. 우선 당장 6월부터는 부산을 자주 오르내려야 하는데 공항에서 귀빈실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귀빈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따로 비행기 표를 예약할 필요가 없다.
승용차에 국회의원 마크를 달고 당당하게 출입하던 국회의사당도 이제 소정의 절차를 밟아 드나들어야 한다. 새마을호 등 무료로 철도편을 이용하던 혜택도 없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국회의원」이라고 할때는 괜찮았으나 이제는 「정당인」이라고 해야 하니 애들한테 미안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외부의 따가운 시선이라고 한다.
남들은 위로한다고 하는 말들이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다. 자신은 하나도 변한게 없는데 주변이 사람을 위축되고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종률의원(3선·64)같은 이는 경기도 여주에 「새농장」하나 차려서 자연을 벗삼아 지내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펴고 있다. 물론 서울에도 사무실은 하나 차려놓고 있어 만일의 기회가 오면 외면하지는 않을 태세이긴 하다.<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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