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후세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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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언뜻 보니 솔제니친이었다. 어떤 사람은 톨스토이의 초상을 연상했다. 미군에 사로잡힐 때 사진 찍힌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다.

잘 다듬어진 코밑 수염은 온데간데 없었다. 얼굴의 반을 덮고 목이 안 보일 정도로 거칠게 자란 구레나룻은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졌다. 오랫동안 머리를 감지 않은 형상이다. 짙은 왼쪽 눈썹이 미간에서 바깥 쪽으로 흐르다 꺾여지는 바로 그 윗지점에 주위가 붉어진 작은 상처 가 있었다. 미군은 후세인이 체포에 협조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진 속의 상처는 어떤 형태로든 후세인이 저항한 흔적으로 보였다. 8개월 만에 드러낸 후세인의 모습은 비참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의 멍한 시선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의 눈앞에서 생존과 출세와 권력을 향해 치달은 66년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란 유복자였다. 찢어질 듯한 가난이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살아 남는 것, 그 자체가 삶의 목표였다. 나 외엔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게 생존의 원칙이었다.

열아홉살 때 참여한 반영(反英)운동으로 대중을 움직이는 선전선동의 묘미를 터득했다. 반외세 민족주의라는 구호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런 이념이나 주의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권력이었다. 영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총리를 암살하려 한 것도 정치조직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였다. 서른한살 때 경찰과 정보기관을 장악해 권력의 2인자로 올랐다. 자기가 몸바쳐 충성했던 대통령의 약점을 잡아 협박으로 최고 권좌를 차지한 게 마흔두살 때였다. 가장 효과적인 통치기술은 공포정치라고 믿었다. 조금이라도 딴 마음을 품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처형했다. 그럴수록 스스로 느끼는 공포는 더해 갔다.

전쟁준비와 전쟁은 대중에게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하고 권력을 중심으로 단결하게 만드는 마약 같은 효과가 있었다. 24년간 나라를 지배하면서 세차례에 걸쳐 10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정권이 학살한 사람은 수십만명에 이른다. 생존에서 시작해 권력을 마감할 때까지 한 순간도 평온한 마음을 가져 보지 못했다. 후세인의 인생은 후세인의 사진보다 더 비참하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