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꿈나무] 따돌림·괴롭힘 … 때리지 않아도 폭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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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모두가 침묵하는 아이
얀 덴 장어르 지음, 송소민 옮김, 이룸
219쪽, 9700원, 중학생 이상

부당함을 감지하는 인간의 센서는 대부분 '내 문제'일때만 제 기능을 한다. 남 얘기가 되었을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는다. 가해하거나 잊거나 방관한다. '왕따'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시히 본스트라, 이 아이도 왕따였다. 졸업 시험을 하루 앞두고 아끼던 자전거와 함께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두 학년을 단숨에 건너뛰고 김나지움(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에 입학한 수재였지만 학교 생활은 고달펐다. 두 살 많은 동급생들은 작고 약한 아이 시히를 죄책감없이 괴롭힌다. 괴팍한 여자 동기 엘리가 시히를 성희롱할 때도, 로프와 헹크가 체육시간마다 볼보이로 부릴 때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대항력없는 피해자 시히는 '피고'로 학급 법정에 선다. 죄목은 '급우에 대한 반사회적 태도'. 아이들은 시히를 괴롭혀 얻은 도서 요약 숙제가 마뜩치 않자 그가 엉터리 숙제를 돈 받고 팔았다며 기소한다. 가해자 엘리도 시히가 호의를 무시해 상처받았다고 위증한다. 시히의 변호사가 된 주인공 피터르는 허위임을 입증하지만, 판사였던 영어 교사 스티프터르는 시히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기소 내용과 무관한 '괘씸죄'다. 교사보다 뛰어난 시히의 영어 실력이 문제였다.

분노했지만 방관했던 피터르. 그는 유능한 변호사가 된 뒤에도 시히의 일에 악몽을 꾸며 죄책감을 느낀다. 25년을 동창들과 떨어져 지낸 그는 떠밀리듯 참석한 개교 100주년 행사 뒤 학급전체를 법정에 세운다. 시히의 자존심을 짓밟은 엘리와 교사답지 못했던 스티프터르 선생은 주범, 침묵했던 모두는 공범이다. 판결은 '모두 유죄'. 피터르는 '시히를 떠올리고 추모하는 것'으로 죄값을 치르라고 판결한다. '그 때' 뭐라고 한 마디 했어야 했던 모두에게 참회를 기회를 주는 셈이다. 상처의 매만짐이다. 그러나 버지니아 외톨이 조승희의 기억이 선연한 우리에게 시히의 죽음은 그저 소설답지 않게 서늘하다. 때리지 않아도 폭력이다.

박연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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