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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내가 누구인지…』 문단 "입씨름" 포스트 모던 기법인가 명백한 표절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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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문단에 표절 시비가 일고 있다. 시비에 말려든 작품은 장편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문학평론가 류철균씨(26)가 이인화란 필명으로 내놓은 이 작품은 올3월 제1회 작가 세계 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론가 류씨를 소설가 이씨로 화려하게 데뷔시켰다.
이 작품은 포스트 모던한 시대 혹은 세기말적 시대에 좌표 잃은 지식인들의 혼란과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의대 졸업 후 의사와 작가의 길에서 망설이다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하는 은우, 작가로 변신하는 것을 말리다 결국 헤어지는 의사세계 밖에 모르는 은우의 애인 의사 윤회,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변혁 운동 전선에서 이탈한 채 갈등 속을 헤매는 정임, 수배되어 나날이 쫓기고 있는 전위조직원 규진, 날로 더해 가는 현실부패에 절망하여 도덕적 파시스트의 출현을 열망하는 문학평론가 박문도 등이 시대 다양한 지식인들을 저마다 장을 달리하며 1인칭 화자「나」로 다루고 있는 것이『내가 누구인지…』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기법이 참신하다』『인물들의 지적인 대하가 소설의 개성과 성공을 이끌어낸 90년대의 새로운 지식인 소설』등 호평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이성욱씨는 다음주초 출간될『한길문학』여름호에 게재한 평론「심약한 지식인에 어울리는 파멸」에서『「내가 누구인지…」는 국내외소설들에서 여러 부분을 옮겨온 명명백백한 표절』이라 주장하며 몇 부분을 예시했다.
『온몸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이대로 촛물처럼 녹아 땅속으로 사라졌으면… 어서 이밤이 갔으면… 어서 이 겨울이 갔으면… 어서 어서 꽃이 지고 찬바람이 불고 아주 아주 늙어버렸으면… 잠 못 드는 이 긴 세월이 힘겹다. 이 젊음이 내겐 힘겹다.』(『내가 누구인지…』)
『온몸이 감각이 무디어지고 이대로 영원히 촛물처럼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어 갈 것만 같다. 어서 이 밤이 갔으면, 어서 이 가을이 갔으면, 어서 어서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아주 늙어버렸으면… 이 젊음이 내게는 너무 힘겨워.』(공지영의『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직은 낯선 여자가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있는 아침. 방안에 온통 술 냄새가 진동하고 머리는 숙취로 지끈지끈 아프고, 이윽고 도깨비처럼 머리가 헝클어진 여자가 옆에서 트림을 하며 일어나는 아침. …여자가「아, 저리 좀 비켜봐요. 내 스타킹 한짝 어디 갔어?」어쩌구 투덜대는 아침』(『내가 누구인지…』)
『눈을 뜨면 옆에 알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쿨쿨 자고 있고, 온방에는 술 냄새가 풍기고…나의 머리는 숙취로 해서 흐리멍덩해 있다. 얼마 후 여자아이가 눈을 뜨고, 슬금슬금 속옷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스타킹을 걸치면서… 투덜대면서』(무라카미 하루키『상실의 시대』)
이상의 예에서 볼 수 있듯『내가 누구인지…』는 어미나 어순을 약간 변형해가며 국내에 번역 출간된 요시모토 바나나·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인기작가는 물론 국내작가의 소설을 부분 부분 옮겨 쓴 것이 많다는 이씨의 지적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경우 그 복사의 정도나 내용이 집중적이고 너무 뚜렷하며 이외에도 자세히 읽어보면 발견되지 않은 표절이 수다하게 널려있으리라는「혐의」를 지울 수 없다고 밝혔다.
이씨는『나름의 절차와 방법을 구비, 누가 보더라도 기존의 어느 작품에서 따온 것을 분간할 수 있게끔 그「공공연함과 명백성」이 드러나야 소설의 한 형식인 패러디로 인정될 수 있는데, 따온 흔적을 부분 부분 도처에 숨져버린 이 소설은 예술적 한 방법인 차용이 아니라 도용일 수밖에 없다』고 이 평론에서 주장했다.
한편 작품발표 직후 평론형식의 글을 통해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차용한 사실을 밝힌바 있는 이인화씨는 이씨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내 작품은 어떤 기존작품을 변형시키되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차용범주에 드는 혼성모방(pastiche)기법을 택한 것으로 도용·표절 운운은 어불성설』이라고 밝혔다.
이씨 소설 표절시비로 미술계에서 간혹 논란을 빚어오던 혼성모방 문제가 이제 문단으로 넘어온 것이다. 독특한 개인의 세계나 스타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의 산물이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기법으로 음악·미술·문학에 파고들고 있는 혼성모방이 미학적·도덕적으로 가능한가를 이제 문단에서 밝혀야 할 때가 됐다.<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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