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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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여름방학을 마치기 전 우리는 엄마의 시골집으로 갔다. 나와 엄마 둥빈과 제제 그리고 막딸이 아줌마까지 한 차에 타고 갔다. 서저마 아줌마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 따로 합류하기로 했다고 엄마는 말했다. 며칠 있을 예정으로 떠나는데도 짐이 꼭 이삿짐 같았다. 먹을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우리들 먹을 것을 챙긴 거야 그렇다 쳐도 사람이 사는 데 무슨 짐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할까.

시골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얼른 정원으로 가서 호스를 뽑아들었다. 정원에는 긴 목을 들고 꽃을 피운 옥잠화와 채송화 그리고 해바라기가 희고 붉고 노랗게 피어 있었다.

"불쌍한 것들…. 주인을 잘못 만나서…. 니들 목말랐지?"

엄마는 애완동물에게 하듯이 나무 하나 꽃 하나에 말을 붙이며 물을 뿌렸다. 봄날 달빛 아래 흰 꽃을 피웠던 배나무는 꽃 진 자리에 황금빛 배를 동전만 하게 달고 있었다. 엄마의 시골집은 강원도 해발 700미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엄마는 언젠가 스위스 산골을 여행하다가 돈을 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골에 집을 한 채 사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기차는 물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스위스 산골을 지나가는데 어떤 소녀가 해가 기우는 여름 정원에 하얀 식탁보를 깔고 접시를 나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는데 그 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고.

엄마는 그 시골집을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면 어린 둥빈과 제제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고 했다. 방학 때는 동생들 학원을 모두 그만두게 하고 그리로 가서 한 달 넘게 머무른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때 마음이 많이 아팠을까?

"알아?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자연이 치유해준대…. 언젠가 책에서 봤어. 중국의 이야기인데 스님이 되려던 젊은이가 그만 전쟁에 끌려갔대. 그런데 몇 년 만에 돌아온 젊은이는 다시 절로 들어가기는커녕 완전히 말을 잃어버린 병자가 되었다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하던 대로 그를 대숲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집으로 보냈대. 거기서 7년 동안 대숲만 바라보고 살던 젊은이는 드디어 완전히 치유가 되어 다시 씩씩하게 돌아왔다는구나…. 믿을 수 있니? 엄마는 믿을 수 있어."

내가 엄마 집에 오기 전 엄마는 가끔 여기 강원도 시골집에서 내게 문자를 보냈다.

-위녕 별들이 쏟아져 내린다. 캔 맥주가 달콤한 건 별 그림자가 그 속에서 별사탕이 되었기 때문인가봐 ^ ^

-위녕 눈이 쌓이고 있어. 밤새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거면서 이토록 아무 소리도 없다니…. 엄마 혼자 소주 마신다. 건배! 캬아

-위녕 번갯불이 저쪽 산등성이에 내리꽂히면 맞은편 산자락에서 천둥이 운다. 교향곡 같아

-달이 우리 식구 셋을 내려다보고 있어.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이곳의 달은 꼭 세수를 뽀독뽀독 하고 나온다 ^ ^

-상상할 수 있니? 오늘 밤 별똥별이 아홉 개나 떨어졌어! 와우!

그럴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우리 엄마가 친엄마 맞아? 였다. 나는 더위를 무릅쓰고 혹은 졸음과 싸워 가면서-흠!(헛기침 소리)-독서실에 앉아 있는데 이런 문자를 보내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서 그 뒤엔 꼭 이런 말을 붙였다. 공부 열심히 해라! 나로 말하자면 성질이 버럭 났다.

시골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서울의 공기가 사이다 같다면 이곳의 공기는 동치미 국물처럼 칼칼하다는 것이다. 나는 막딸이 아줌마가 고기를 구울 숯불을 피우는 동안 뒤뜰로 가서 고추와 상추를 땄다. 신기하다. 내 방보다 작은 텃밭에서 이렇게 많은 고추와 상추 그리고 깻잎이 열리다니. 그뿐인가 호박이랑 오이랑 가지랑 방아까지 있으며 레몬 밤이나 로즈마리 같은 허브들도 마지막 초록빛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상추와 고추를 따다 말고 허브 밭으로 가서 레몬 밤을 하나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새콤하고 쌉싸래한 레몬의 노란 맛이 내 혀로 가득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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