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J컬처의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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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키바족의 열광적 수집 대상이 되고 있는 여전사 피겨.

한류 열풍 속 우리 대중문화계에는 '일류' 바람이 한창이다. 영화.드라마.방송 등 국내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키워 가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의 힘은 무엇일까. 또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 현장을 다녀왔다.

지난달 30일 도쿄의 아키하바라. 일본 전자산업의 메카로 통했던 곳이다. 용산 전자상가의 원형쯤 될까. 예전에 일본 여행을 가는 사람에게 '코끼리 밥솥' '소니 CD 플레이어' 같은 전자제품을 사 달라고 부탁했던 곳이다. 그러나 아키하바라는 더 이상 가전제품의 거리가 아니었다. 일본 대중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캐릭터.디지털 콘텐트의 거점으로 변해 있었다. 광적인 문화 매니어를 뜻하는 오타쿠의 거리, 오타쿠의 성지로도 불린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DVD와 액션 피겨(만화.애니메이션 주인공 인형), 각종 캐릭터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빌딩 숲을 이루고 있다. 상가 끝 위용도 당당한 최첨단 빌딩에는 각종 IT 업체, 디지털 콘텐트 관련 대학연구소가 입주해 있다.

만화 주인공처럼 차려입고 홍보 전단을 돌리는 아키하바라의 여성들(上)과 아키하바라 피겨숍의 모습.

거리를 가득 메우며 상가를 기웃거리는 이들이 네오 오타쿠인 '아키바족'이다. 대부분이 남성이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10대 후반~30.40대 남성들이 '건담' 프라모델이나 SF.순정만화 속 미소녀 피겨 앞을 서성댄다. 길거리에는 일명 '캔디'풍의, 만화 속 하녀 옷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메이드 카페' 홍보전단을 나누어 준다.

아키하바라의 명물로 떠오른 메이드 카페에서는 하녀 복장의 여종업원이 손님을 '주인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접대한다. 추가로 돈을 내면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거나 1대 1로 따로 만나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한때 인기 있었던 '코스프레 카페'(종업원들이 만화 주인공 옷차림을 입은 카페)를 밀어내고 성업 중이다. 아키하바라에서만 30여 곳이 있다.

10층짜리 피겨숍 건물 5~7층을 차지한 메이드 카페로 들어가니 20대 남녀 50~60여 명이 비표를 들고 대기 중이다. 외설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고 유아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남자친구와 함께 온 여성 고객들이 눈에 띄었다.

아키바족은 아키하바라를 거점으로 한 신흥 오타쿠다. 쇠락해 가던 아키하바라를 콘텐트.캐릭터의 거리로 부활시켰다. 아키하바라의 부흥으로 오타쿠의 이미지까지 달라졌다. 한때 사회 부적응자나 자폐아 취급을 받던 오타쿠가 연간 4조원에 이르는 '오타쿠 시장'을 이끄는 막강 소비자.문화 주체로 위상이 바뀐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오타쿠의 경제력과 문화 창조력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정치인까지 나서서 아키하바라를 일본 문화산업과 IT의 메카로 키우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현상에는 최근 일본의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떠오른 '모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모에'는 만화 주인공에게 느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감정, 미소녀와 귀여움에 대한 열광을 뜻한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만화 주인공을 실제 연인처럼 사랑하는 심리를 의미한다. '싹트다'란 뜻의 일본어 '모에루'에서 나온 말이다. 미소녀 피겨를 사 모으고 메이드 카페를 드나드는 아키바족의 행태를 일컫는다.

최근 뉴스위크 재팬은 '모에의 세계'라는 특집기사를 통해 모에 문화의 세계적 확산에 주목했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유럽.아시아.이슬람에 상륙했으며, 피겨.메이드카페.코스프레.아니메카페 같은 모에 현상까지 수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NBC의 인기 드라마 '히어로즈'에 나오는 오타쿠가 지적이고 멋진 존재로 그려졌다는 점도 강조했다. 배역을 맡은 오카 마사요리는 실제로도 IQ 180의 천재 오타쿠로 '타임' 커버도 여러 차례 장식한 인물이다.

'건담' '세일러 문' 등의 피겨를 생산하는 일본 최고의 완구 업체 반다이 홍보 담당자는 "모에 현상 등에 힘입어 최근 5년간 아키하바라가 놀랍게 달라졌다"며 "열혈 소비자인 오타쿠들이 성장함에 따라 관련 상품의 시장도 급속히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모에'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아키하바라에서 만난 한 일본인 50대 주부는 "실제 이성을 잘 사귀지 못하는 젊은 남성들이 만화 속 캐릭터에 열광한다"며 "일본 여성들이 점자 독립적으로 변화하는 반면, 남성들은 전통적.순종적 여성상에 대한 욕구를 모에를 통해 풀고 있다"고 말했다. 중학생 아들을 둔 그는 "메이드 카페를 찾는 남성 중 상당수가 이성교제에 서투르다"며 "가상현실에 빠져들수록 현실의 인간관계에 미숙해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도쿄=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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