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관계 「새 틀」 짤때다/이종대(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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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와 현대그룹의 갈등관계는 우리나라 정치권력­재벌의 관계가 걸어온 긴 도정에서 하나의 이변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이다.
산업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정치권력 우위의 정경구조가 지니는 성격이 우리 사회구조의 전반적 성격을 짙게 채색하면서 재벌기업은 정치권력,또는 정부에 대들기를 최대한 기피해 왔고 드문드문 있었던 양자간의 마찰은 언제나 재벌기업의 완패로 끝날 뿐이었다. 이같은 일방적 우위의 관계는 정권내지 정부의 비위를 건드리는 「괘씸죄」가 가장 무거운 죄라는 업계의 쑥덕거림 속에 잘 표현되고 있다.
○권력의 일방적인 우위
그렇다면 권력우위의 정경질서에 대한 「현대의 반란」은 그 질서의 성격자체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신호인가,아니면 그것은 정부­현대간의 우발충돌에 기인한 일회성 사건에 불과한 것이고 묵은 구조의 본질은 앞으로 오래 존속할 것인가. 이 둘중 어느 방향으로 변화의 가닥이 잡힐 것인지 지금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쪽이냐에 따라 정치행태와 경제활동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먼저 권력과 재벌의 분극화 징후로 생각할만한 근거들을 살펴보자.
정치권력이 재벌기업에 특별한 혜택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또한 시장을 위한 기업의 생산활동으로 거둬들이는 경제적 이득이 크게 불어난 만큼 권력으로부터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권의 상대적 매력은 그만큼 작아졌다고 할 수 있다.
○청산해야 할 톱니구조
뿐만 아니라 민주화의 진전으로 인해 이권을 주고 받는데 따르는 위험부담이 옛날보다는 현저하게 커졌다는 점도 정경유착의 끈을 느슨하게 만든 여건변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변화는 정부를 포함한 정치권력과 재벌기업 사이에 나타나는 조직과 능률면의 비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적 자원·조직력·생산성·정보등 여러측면에서 대기업이 정치권력,또는 정부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는 사실은 재벌기업의 홀로서기를 내다보게 하는 가장 유력한 근거로 삼을만 하다. 또한 대기업으로서는 근로자·소비자·지역사회와의 관계가 지니는 중요성이 커지면서 정치권력,또는 정부와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졌고 정치권력쪽에서도 재계·대기업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회집단을 전보다 더 큰 비중으로 배려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와는 달리 대기업이 권력의 눈치를 보는 정경유착구조가 앞으로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력,또는 정부의 대기업에 대한 규제의 범위는 날로 확장되고 있다.
금융·세제·노사관계·부동산투기·경제력집중과 관련된 법과 규제조항들 말고도 산재방지·환경보호·소비자보호를 위한 사회적 규제에 이르기까지 기업경영활동을 제약하는 법과 규제의 양은 너무나 많아 모든 규칙을 완벽하게 지키는 기업은 하나도 없을 정도다.
이러한 사정은 또한 국가공권력을 총동원해도 모든 기업의 규칙위반을 빠짐없이 적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규제내용의 모호성까지 감안하면 선별적·재량적 기업규제의 개연성은 매우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측에서는 규제대상에서 빠져나가 제재를 탕감받으려는 유인이 강하게 작용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먼지들을 감추고 싶어하는 기업들이 있고,다른 한편으로는 먼지털이를 거머쥔 정치권력,또는 정부가 존재하는 상황은 권력에 대한 재벌의 도전을 어렵게 만든다. 더구나 「괘씸죄」를 면해야 하는 기업측의 필요와 정치권력쪽의 막대한 정치자금 수요는 양측을 손쉽게 맞물리게 하는 톱니역할을 한다. 이런 구조를 빨리 청산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지금 당장 쟁점으로 부각돼 있는 현대­국민당의 관계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정경관계를 건전한 토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현대사태를 새 전기로
정경관계상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사회적 감시기능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는 새로운 관계의 정착을 촉진시키는 호재다. 이번 현대사태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불행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정경관계의 새로운 틀을 짜기 시작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가 특정기업을 특별히 이롭게도,해롭게도 하기 어려운 상황은 현대사태를 계기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치에 필요한 돈을 줄이고,기업규제와 기업의 먼지를 가볍게 만드는 일은 그같은 호재와 계기를 살릴 수 있는 기본 요건이 될 것이다.<기아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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