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서양철학사 쉽고 재밌게 맛보실 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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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세계사를 바꾼
철학의 구라들
폴커 슈피어링 지음
정대성 옮김, 이룸, 560쪽
1만9700원

보통사람들의 입맛과 수준에 딱 맞게, 인물 중심으로 간추린 서양철학사 책이다. 그러니 책 제목 자체가 구라(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셈이다. 거창하게 세계사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류 정신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을, 구라가 아니라 제법 진지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책은 철학의 아버지라는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에서 20세기 미국의 분석철학자 리처드 로티까지 55인의 철학자를 연대순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그 소개방식이 다른 철학사책과 구분이 될 정도로 간명하고 독특해 눈길을 끈다. 우선 고대, 중세, 근대, 현대(19세기 이후)로 나눠 각 편 머리에 시대의 철학을 개관하는 간략한 글을 실었다. 그리고 철학자 한 명씩 다룬 각 장은 그의 핵심사상을 정리한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만물은 흐른다"(헤라클레이토스)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프로타고라스)처럼 귀에 익은 말들은 일단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물론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처럼 묵직하게 시작하는 사르트르. 비트켄슈타인 편도 있긴 하다.

이같은 맛보기가 지나면 해당 철학자의 중심 사상을 쉽게 풀이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일대기와 시대 배경도 녹여냈다. 여기엔 철학자의 개인적 서신, 일화 등을 실어 사상가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삶은 고통이다"라고 한 쇼펜하우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게 아내와 아이가 없는 운명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네…나는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구역질이 나 있었고 그들과 시간을 낭비하는 건 가치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정신적으로는 정신병 환자들이고 도덕적으론 사기꾼들의 집단이지"라고 자신의 근황을 전한다. 이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가 진심으로 세상은 보기에 아름답지만 그 존재는 전혀 다르다고 인식했음을 알게 된다.

책에 실린 철학자 명단에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방대한 철학사를 이토록 잘 정리해 내기도 쉽지 않다. 지은이는 "위대한 철학은 짧은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가슴 울리는 소리, 꽉 찬 음향을 가진다"란 말로 글을 시작했다. 그 의도에 걸맞게 쓰여진 똑똑한 철학입문서다. 제목과 달리.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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