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내부적 악마 키웠다 예수 흉내냈지만 종교성 빈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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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공대에서 32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조승희가 범행을 저지르기 6일 전 미리 찍었던 동영상.사진.자료 패키지 중 한 사진. 18일(미국 현지시간) 공개됐다. 모자를 거꾸로 쓰고 주머니 속 탄창으로 축 처진 조끼 차림에 두 자루 권총을 든 양 손을 어깨 위로 쫙 폈다. 이 사진은 범행 당시 목격자들이 본 모습과 비슷해 사전 기획이 치밀했음을 보여 준다.[AP=연합뉴스]

"섬뜩했다. '이스마일 액스(Ismail Ax.분노의 도끼 혹은 이슬람의 복수)'라는 글씨가 팔에 새겨져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다. 이스마일은 이슬람 교도들의 조상 아닌가. 그렇다면 이슬람 전사를 자처했다는 것인가. 그런데 그가 남긴 '선언문'에서 예수를 흉내내는 문구와 부자를 증오하는 듯한 표현은 또 뭔가. 그가 처형하려는 적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현재로선 정신이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미국 보스턴에 체류하고 있는 소설가 이문열(59.사진)씨가 19일 기자와의 전화에서 털어놓은 소감이다. 이씨는 인간의 종교적 속성과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다. 1979년 발표한 출세작 '사람의 아들'이 그러했고, 2006년 최근작 '호모 엑세쿠탄스'가 그 흐름을 이었다. 특히 '호모 엑세쿠탄스'의 뜻은 '처형하는 인간'이다. 범인 조승희의 '선언문'에서 연상되는 단어가 '처형'이다. 이씨는 소설을 통해 인간에게 '처형하는 속성'이 있음을 그려냈다. 조승희는 선언문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단순화하며 자신의 총기 난사 사건을 '거사'로 정당화했다.(범인 조승희는 거주지 한인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그를 고교 때 지도했던 한인 K목사는 "머리가 좋았고 성경 얘기를 하면 금세 이해했다"고 기억했다.)

-조승희를 호모 엑세쿠탄스로 볼 수 있을까.

"호모 엑세쿠탄스는 구체적 현실의 삶과는 무관하게 자기들의 책무(처형)에 매진한다. 조승희가 강의실 학생들을 단순한 버지니아공대생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면, 그렇게 해서 사회의 악이 사라질 것으로 믿었다면 그에겐 호모 엑세쿠탄스의 속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위를 정당화할 순 없다."

-조승희가 "십자가 위에서 모욕당하고 결박당한 기분을 아는가"라고 표현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그가 구사한 몇몇 용어를 놓고 그의 행위를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종교성을 뒷받침하는 물증이 너무 빈약하다. 조승희가 종교적으로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종교성이 강하면 전파력(전도)이 있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버지니아공대에 수백 명의 한국인이 있다는데 그의 신원 확인에 애를 먹었다고 하지 않나. 전파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어떤 자신만의 내부적인 악마를 키워 왔다."

-"벤츠로 만족 못하나"는 등 쾌락과 부를 증오.저주하는 표현은 어떤가.

"선언문에 증오는 가득하지만 구체적인 증오의 대상인 '너희'가 분명치 않다.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부자나 쾌락주의라고 하기에도 부족하다. 조승희만의 내부적 악마나 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예수처럼 죽는다(I die like Jesus Christ)"는 구절도 보인다.

"느닷없을뿐더러 종교성을 표출하기엔 불충분하다. 병든 미국 정신의 한 증상으로 볼 수는 있겠다. 유나바머(과학기술문명을 증오한 테러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그의 동영상으로 사건이 예상 밖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 같다.

"현재로서 종교적 해석은 무리인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번 참사를 21세기 미국 사회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 사회의 보편적 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돌출적 예외로 봐야 할지는 말하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문제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대구지하철 방화와 같은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졌듯이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사회가 예외일 수 없음도 유의해야 한다."

-참사를 예방할 순 없었을까.

"신호가 여러 차례 있었다. 강의 시간에 그가 들어오면 여러 학생이 자리를 피했다든지, 작문 선생이 그의 글을 보고 너무 끔찍하다고 걱정했다든지, 또 그의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잘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든지 하는 것 등이다."

-한국 출신이란 점이 걱정되는데.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고 영어로 사고한다. 일상어도 영어였다. 그는 이미 미국적 사고를 하는 미국인이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아직은 해답을 말하기 전에 해석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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