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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각계서 진상 규명 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이념 굴레 묶여 제대로 논의 안돼/정확히 밝혀 역사적 교훈 삼아야/남은 상처 치유위해 정부차원 작업 절실
미 군정·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게릴라·일부주민과 군경의 충돌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던 「제주도 4·3사태」 44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당시의 실상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작업이 활발하다.
2일과 3일 서울대·한양대등 서울시내 대학가에서는 일제히 추모 및 계승집회가 열렸고 민족문학작가협회와 4·3추모제준비위등 진보학계에서도 추모주간을 만들어 각종 세미나와 추모제·그림전시회를 갖는등 진상규명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 「제주 4·3연구소」(소장 고창훈 제주대 교수)는 1일 북제주군 구좌읍의 들판 자연동굴에서 당시 토벌대에 의해 숨진 것으로 보이는 11구의 남녀유골을 발견,공개하기도 했다.
유골들은 여성 2∼3명을 포함,10대 초반의 어린이에서 60대까지로 추정되고 있으며 별다른 외상이 없는 점으로 보아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처럼 굴입구를 막고 불을 질러 질식사 시켰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주 4·3사태」는 해방이후 반세기가 다되도록 우리 현대사에서 가려진 역사였다.
48년 4월3일 새벽 한라산에서 훈련된 5백여명의 게릴라와 동조자 1천여명이 5·10총선을 반대하기 위해 도내 11개 지서를 일제히 습격,방화하고 군경이 이에 대해 무차별 보복을 하면서 최소 3만∼최고 8만여명에 달하는 양민들이 숨진 「사태」였다고 전해지고 있을뿐 아직까지도 정확한 역사적 성격규정을 받지 못한 상태다.
진보학계와 운동권 대학생들은 4·3사태가 「미군정과 매판정권에 대항한 민중항쟁」임을 주장하고 있고 정부는 「공산게릴라의 사주를 받은 반군들의 폭동」이라는 입장이다.
이같은 현실을 반영하듯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4·3사태를 묘사한 책들은 대부분 판금됐었고 방송 등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었다.
4·3당시 살아남은 농부가 30여년이 지난뒤까지 악몽에서 시달리다 결국 자살하고 만다는 내용인 현기영씨의 소설 『순이삼촌』은 79년 출간되자마자 판금조치를 당했을 정도다. 그러나 6·29이후 억압조치들이 철폐되면서 학계와 문단에서 당시의 참상에 대한 작품과 논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옴에 따라 재조명작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운동권에서도 광주민주화항쟁처럼 「4·3」의 성격도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까지는 4·3사태에 대해 외세개입적 측면을 강조,당시 동북아를 재편하던 미국이 발호하는 공산세력에 대한 쐐기를 박기위해 학살을 주도했다는 입장과 분단과 단정수립 등으로 첨예화된 좌우대립에 당시 제주도의 사회구조적 모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4·3사태」의 원인과 경위가 무엇이든 정부로서는 그로인해 많은 수의 양민들이 숨졌다는 아픈 역사를 다시 끄집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반정부운동의 원인제공을 하던 「광주사태」가 청문회 등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역사속에 자리매김을 하면서 비로소 치유의 실마리를 찾았듯이 「4·3사태」도 현대사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서라도 정확한 진상규명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여론이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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