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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핵 노다지』를 캐라|우라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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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집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꿈에 황소머리 세 개를 보았다」고 말했어요.「이크, 길조로구나」고 생각했지요. 소(우)가 셋이라면 우3, 즉 U(우라늄)3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어요.「U3 O8 」(우라늄 정광의 분자식) 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었지요. 꿈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아내에게 당부해 놓고는 등산복에 가이거 계수기를 챙겨 들고 그날로 산으로 떠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거의 한 평생을 바쳤습니다.』
최규택씨(62·국조 우라늄 광업 전무)의 생애는 한마디로「우라늄인생」이라 할 만하다. 그는 무려 35년 동안 남한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우라늄 탐사 작업을 벌였고, 어렵게 찾아낸 국내 우라늄 원광을 개발하고자 애를 썼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말기에 한때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의 여파로 국제 시장에서의 우라늄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을 때 국내 우라늄 자원을 개발하자는 논의가 본격화 됐었다. 그러나 핵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그의 집념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렀다. 미국 스리마일 발전소 방사선 노출 사고(79년)의 여파로 우라늄 수요가 줄자 가격이 대폭 떨어졌다.
박 대통령이 사망하자 우리의 핵 개발 노력도 일시에 중단됐고 관련 과학자들은 대부분 신 군부에 의해 찬 서리를 맞았다. 게다가 국산 우라늄 원광은 지나치게 품위가 낮아 경제성이 적었다.

<35년간 전국 누벼>
우리나라에서의 우라늄 탐사 작업은 이미 50년대에 시작됐다. 미국이 단 두 방의 원자탄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2차 대전을 끝내자 이 엄청난 폭탄의 원료인 우라늄 광산을 찾기 위해 세계 각국은 몸이 달았다.
『56년 도에 유엔 개발 계획의 자금 지원으로 국내 우라늄 광 탐사 작업이 벌어졌어요. 하야시 라는 일본인 학자가 그 용역을 맡아 지프를 타고 휴전선 부근에서 남해안까지 훑고 다니다가 충청북도 보은에서 광맥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시 일본에서 사업하던 선친에게서 그같은 정보를 들었습니다. 솔직히 귀가 솔깃해지더군요. 그 때는 세계적으로 우라늄 광을 금 덩어리 노다치 처럼 여기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57년부터 탐사 작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김유정의 소설『금 따는 콩밭』을 연상케 하는 최규택씨의 우라늄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최씨의 경우는 비록 사업 초기에 우라늄 자체를 과대 평가한 면은 있지만 무작정 허황한 신기루를 쫓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우라늄 탐사 붐이 한풀 꺾였을 때였지만 아직 세계 각국의 많은 모험가들이 자기 나라의 산천을 헤매며「원자탄용 노다지 발견」을 꿈꾸고 있기도 했다.

<간첩 오인 받기도>
시운이 편들지 않아 소원이 결실을 보지 못했으나 최씨는『광물 탐사는 어디까지나 벤처(모험) 사업』이라는 말로 자위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중인 고향(평양)친구에게 부탁해 미제 구식 가이거 계수기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2백50달러가 들었어요』 주로 충청북도의 옥천계 석탄층을 뒤지고 다녔지만 그 밖의 남한 내 웬만한 산맥 치고 최씨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한 기계 뭉치(가이거 계수기)를 어깨 멜빵 차림으로 갖고 다니며 종일 산 속을 헤매고 다녔으니 주민들의 오해를 받지 않을 리 없었다.
『행색이 수상한데다 이북 말씨(최씨는 평양에서 교원 대학까지 마치고 48년 월남했다)를 쓰니까 딱 떨어지는 간첩 용의자였던 모양이에요. 여러 번 신고를 당했지요. 시골 사람들에게 우라늄이니 방사능이니 어쩌니 하고 설명하느라 애먹었습니다』
부인이 쇠머리 꿈까지 꾸게 할 정도로 전국 산야를 돌아다니던 최씨는 50년대 말 드디어 우라늄 광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외로움과 무력감을 달래려고 소주병을 꿰차고 충청도 산골을 걷던 어느 날이었어요. 귀에 꽂은 리시버에서「타닥 타다다닥」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군요. 계수기의 램프에서는 빨간 불이 반짝거리고요. 하늘 나라의 음악소리도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겁니다. 그 순간의 기쁨이라니…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되지요. 보은군 회남면 산속 이었어요.』
최씨는 현재 50여 광구의 광업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발견한 광구들을 지도에 소중히 표시하고 정부에 허가 신청서를 내 71년께부터는 시추가 시작되었다. 동력 자원 연구소가 시추작업을 주관하고 나섰고 광석 샘플을 국내·해외 기관에 보내 분석을 해보았다. 그러나 아깝게도 하나같이 함량 부족이었다.
내년 1차 원유 파동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로서는 핵무기 개발도 개발이지만 당장 에너지 파동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차 원유 파동 전에는 파운드 당 7∼8달러에 불과하던 우라늄 가격이 77년 11달러, 76년 39·7달러, 79년에는 무려 42·5달러로까지 쭉쭉 치솟았다. 그것도 선불을 주어야 국제 시장에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78년께 장례준씨가 동자부 장관이던 시절이었어요. 그전부터 추진하던 미국 회사(유니언카바이드사)와의 우라늄 합작 개발 사업 계획을 장 장관께 건의했습니다. 국산 우라늄이 품위는 낮지만 매장량이 많은 편이니 속히 개발해 외화도 절약하고 에너지 자립도 꾀하자고 했지요. 좋다고 하더군요』

<오원철 수석에 보고>
당시 최씨의 우라늄 탐사작업에 일종의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던 기업인 C씨가 이같은 계획안을 갖고 78년 가을 청와대 비서실로 들어가 오원철 경제 2수석 비서관을 만났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오 수석은「이 귀중한 우라늄 자원을 왜 외국 회사와 합작해 개발하려 하느냐」는 이유를 들어 합작 계획을 기각했다는 것이다.
일이 꼬이자니 80년부터 우라늄의 국제 시장 가격은 지속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국내 우라늄 자원은 최씨의 꿈과 함께 아직도 땅속에 묻혀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우라늄을 찾는다, 분석한다 하며 국내외를 돌아다니다 공연히 간만 커진 것 같아요. 주위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광물에 눈을 돌려보아라. 요새는 그 흔한 석재도 값이 만만치 않다 더라」고 권하곤 합니다. 집사람도 이제는 우라늄에 관련된 꿈을 꾸지도 않거니와 간혹 꾸어도 아예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와서 다른 일은 못하겠어요. 국내 우라늄 광에는 희귀 금속인 바나듐이 다소 포함돼 있는데, 그걸 뽑아 내 이용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에요 . 우리 땅속에 묻힌 자원을 왜 그냥 썩입니까….』
최씨의 말에서는 한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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