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가족에 여러 戶主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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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선시대 호적대장을 한글로 번역하는 전산화 5개년 작업이 완료됐다. 일제시대에 왜곡된 호적.호주제도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나아가 17~19세기 조선 사회사와 생활사를 새롭게 밝혀줄 방대한 작업이다.

'조선왕조실록'한글 번역 CD가 나와 학계에 미쳤던 큰 영향에 버금가는 역할을 기대해 볼 만하다.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원장 임형택)은 1606년부터 19세기까지 기록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현 일대의 호적대장(이하 단성호적)의 한글 번역본을 CD 6장에 담아 펴냈다.

단성호적의 한글 번역본 CD 출간을 기념해 오는 19일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에서 관련 학계에 무료로 제공할 예정이다. 이 작업엔 권내현.김건태(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등 1백여명의 연구자가 참여했다.

단성호적은 한 지역 단위로 3세기에 걸쳐 온전한 기록이 남은 가장 양질의 자료로 평가받는다. 모두 6백만자 정도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전체 자수(약 5천3백만자)의 10분의 1이 넘는 분량이다.

단성호적을 통해 볼 때 일제시대부터 제도화된 오늘날의 호적법은 조선의 호적법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조선시대 호적에서도 호(戶)를 대표하는 사람은 있었는데 이를 '호주'라 하지 않고 '주호(主戶)'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엔 한가족 내에 여러 개의 호를 구성할 수 있었다. 예컨대 아버지와 여러 명의 아들이 각기 다른 호를 구성하고, 각기 주호가 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여성도 주호가 될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이 미혼인 경우에는 어머니가 주호가 됐다. 그러다가 아들이 결혼하게 되면 아들이 주호가 되고, 어머니는 아들의 솔거인(率居人)이 된다. 남편이 살아있는데도 부인이 주호가 되고, 남편은 부인의 솔거인으로 등재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풍부했던 이유는 호적의 성격과 기능이 다른 데서 비롯된다. 김건태 교수는 "조선시대 호적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군역과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다"면서 "이는 오늘날의 호적이 호주와 나머지 가족 사이의 관계를 공증하는 문서로 기능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방대한 호적 내용 가운데 호주에 관한 사항만을 단편적으로 추출해 연구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모습"이라며 "이제 단성호적 CD를 통해 호적 연구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대동문화연구원은 이처럼 새롭게 밝혀진 조선 호적법의 성격에 대한 연구논문을 모은 책 '단성 호적대장 연구'를 CD와 함께 펴냈다. 또 단성 지역 향촌사회사 자료를 모은 영인본 '경상도 단성현 사회자료집'(전3권)도 펴낼 예정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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