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란여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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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부란­. 19일 타계한 프란체스카여사의 한국 이름이다. 이승만박사가 귀국후 지어준 그의 한국이름은 별로 사용되진 않았지만,그를 58년동안 「벽안의 한국인」으로 살고 갈 수 있게한 인내와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경무대를 떠날 결심을 굳히자 나는 경황중에도 대통령이 경무대 뒷산을 산책할때 신던 헌신발을 찾아 신겨드렸다. 그리고 주방으로 내려가 찬장 서랍을 열고 대통령의 수저와 젓가락,식탁위의 성경,반쯤 남은 밀껍질차병을 핸드백에 챙겨 넣고 따라나섰다.
프란체스카여사는 후일 그의 저서 『대통령의 건강』에서 4·19때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겨가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남편 이승만 대통령에게 쏟은 아내로서의 애정과 살뜰한 보살핌,안방살림을 꾸려가는 주부로서 보여준 근검절약의 일화들은 수없이 많다. 해어진 양말을 꿰매 신었고 이박사의 와이셔츠 칼러가 낡으면 떼내 앞뒤를 바꾸어 다시 달아 드렸다.
또 이박사가 여름철 산책할때 쓰는 밀짚모자의 윗부분이 해어져 구멍이 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해두면서 낚시갈때 쓰도록 했다.
이대통령이 낚시가거나 여행할 때면 차를 끓여 보온병에 담고,김밥과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꼭 따라다니며 식사를 보살폈다.
6·25전쟁중의 부산피난시절. 경남지사 부인이 프란체스카여사를 대접하려고 콩나물국을 정성스레 끓여갔다.
국물을 두어모금 마셔보니 속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입맛이 당겨 콩나물국을 다먹고 싶었지만 참고 남겨두었다가 남편에게 권했다. 이박사는 「당신이나 마실 일이지…」하면서도 단숨에 국그릇을 비웠다.
그에게는 단돈 5만원을 가지고 피난길을 떠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속에서 용변을 봐야했던 시골변소와 이박사가 피난열차속에서 자신의 오판을 고뇌하던 6·25전쟁도 가슴아픈 기억이었다.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자신을 한국인화하는데 온 정성을 다했던 이부란여사­. 영욕이 교차하는 일생을 살고간 우리나라 첫 퍼스트 레이디의 명복을 빈다.<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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