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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의 TV 뒤집기] ‘과거사 진상 규명’ 필요한 스포츠 중계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아시아의 기적을 일으킬 것인가! 박태환! 박태환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박태환 박태환 박태환, 치기 시작했어요! 박태환 박태환 박태환 따라잡았어요! 대단하네요! 박태환 꿈꾸던 금메달을 딸 것인가! 박태환 박태환 금메달 금메달! 아시아 최초로 금메달을 딸 것인가! 박태환 선두예요! 아시아 최초! 아! 금메달! 슷~~바라시이이이이이이!(대단해요!) 엄청난 기록이에요! 아시아 기록을 깼어요! 이야…설마설마 했는데. 마지막 50m 기록은 이언 소프 수준이네요. 아…이건 정말…해킷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땄어요!”

내가 만일 ‘스포츠를 스포츠로만 숭배하는 사람의 모임’을 만들 수 있다면, 심장마비가 염려될 정도로 ‘캡흥분’해 가지고 역사적 순간을 중계해 우리에게 감동을 준 일본 아사히 TV의 수영 캐스터에게 감사패라도 증정하면서 인터뷰해보고 싶다. 스포츠를 중계한다는 건 이런 거다. ‘우리나라’ ‘대한건아’, 이런 거에 목숨 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순도 높은 에너지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그 드라마틱한 현장의 감동을 전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 한 장면을 만들어주는 것.

또 내가 만일 ‘스포츠 방송에 생의 낙을 걸고 사는 백수들의 모임’을 만든다면 그 순간을 그렇게 인터넷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중국 CC-TV 생중계나 일본 TV 동영상으로 감동을 달래게 만들었던 우리의 공영방송 KBS에 ‘올해 최악의 방송 편성’ 상을 드리고 싶다. 중국ㆍ일본처럼 남의 나라 선수 경기를 생중계하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우리의 방송은 최소한 금메달 이후 박태환의 경기도 제대로 중계하지 않았다. 200m 결승전을 숙제하듯 짤막하게 방송한 TV는 막상 탈락 위험이 있었던 1500m 예선전에서도 그의 경기만 잠깐 중계한 뒤 여전히 다른 조 경기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인터넷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만들었다. 결승전만 한 시간 특집으로 편성했던 KBS는 막상 그의 결승 진출 여부가 달린 다른 조 예선을 중계하지 않아 탈락의 순간을 또 놓쳐버렸다. 애타는 예선의 ‘과정’은 생략하고 금메달이라는 환희의 ‘결과’만 보고 달려든 방송사는 진짜로 중요한 순간을 ‘PLAY’하지 못했다.

이번 건에 격분한 이 열혈 시청자가 옛날 기억까지 들춰내 ‘스포츠 방송 과거사 진상 규명위원회’를 만일 만든다면, 우리의 축구 영웅 차범근의 해트트릭 전설 영상 분실 사건에 대해 엄중한 청문회라도 열고 싶다. 1976년 서울에서 열린 대통령컵 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4-1로 뒤지던 후반, 7분을 남기고 3골을 몰아넣는 그 기적을 감행하신 차범근의 영상이 없단다. 그래서 그 기적은 그걸 가물가물 기억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돌아가신다면 말 그대로 역사가 아닌 전설로만 남게 됐다.

스포츠는 소중한 역사다. 차범근이나 박태환이나 김연아 같은 사건은 우리의 사회사를 비춰내는 그릇 같은 거다. 그런데 방송은 우리 스포츠의 소중한 현재를 ‘플레이’하는 것도 놓치고, 역사를 ‘리플레이’하는 것도 놓친다. 한ㆍ미 FTA 때문에 방송시장도 개방된다고 걱정들인데, 정말 이 정도로밖에 스포츠 콘텐트를 다룰 능력이 안 된다면 ‘한국 스포츠 방송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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