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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풍경] 철원 조류보호協 이시우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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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를 끝낸 들녘은 칙칙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대쌀'로 유명한 강원도 철원평야는 늘 예외다. '한 추위'하는 곳이라 겨울도 빨리 찾아오건만 겨울 빛이 깔리기가 무섭게 오히려 생명력이 넘친다. 겨울철새들의 방문 덕분이다. 철원은 이렇게 매년 두 번 산다.

이미 영하 10도를 경험한 때문에 이곳에선 벌써부터 진객(珍客)들의 버라이어티 쇼가 한창이다. 인기척에 놀라 하늘을 뒤덮는 수만마리 쇠기러기떼의 군무(群舞)하며, 금실을 자랑하듯 나들이 참에 때때로 뽑아내는 두루미 가족의 청아한 합창, 논바닥에 버려진 뼈다귀에 엉겨붙어 먹이다툼을 벌이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하늘을 희롱하는 독수리들의 거만한 날갯짓 등등.

말로만 듣던 진풍경 앞에 넋을 놓고 있는데 '야생조류순찰'이라고 씌어진 트럭이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한 사내가 내린다. 철원에서 '겨울 촐랭이'로 통하는 한국조류보호협회 철원지회 이시우(李時雨.42)회장이다. 어감상 썩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14년째 새를 쫓아 사는 인생, 그것도 특히 겨울철에 더욱 바삐 돌아치는 까닭에 붙여진 애칭이고 보니 어쩌랴. 회원들과 함께 모이를 주랴, 다치거나 병든 놈들 치료해주랴, 밀렵이나 새 살림 방해 행위를 감시하랴, 주민들에 대해 동참을 설득하랴, 찾아오는 외부인들에게 생태교육을 하랴, 그는 요즘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다.

"근년에 이곳에서 관찰되는 새는 15목 40과 97속 1백69종이에요. 이 중 텃새는 33종뿐이고 나머지는 여름철새 54종, 겨울철새 47종, 통과조 35종 등이죠. 여름철새는 이곳을 번식지로 하는 종이고 겨울철새는 월동을 하는 데 비해 통과조는 이름 그대로 그냥 스쳐 지나는 종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몸으로 때워 새에 관한 한 어느새 '빠끔이'가 돼버린 그의 설명이 또렷이 귀에 박힌다. 이어 이 회장은 새들의 이름을 한참이나 주워 섬긴다. 논병아리.큰고니.흰뺨검둥오리.비오리.말똥가리.잿빛개구리매.직박구리.황조롱이.붉은머리오목눈이.곤줄박이.촉새.양진이.어치….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들인지 가늠이 서지 않지만 순 우리말로 붙여진 하나 하나가 정겹기만 하다. 특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루미(202호).재두루미(203호).황조롱이(323호).수리부엉이(324호).독수리(243호) 등에 대해선 생태적 특성과 특징, 찾아오는 마리수까지 두루 꿴다.

"하지만 철원을 대표하는 새는 뭐니뭐니 해도 두루미죠. 세계적으로 2천마리 미만의 멸종위기종인데 5백여마리가 이곳을 찾고 있으니 대단한 일이죠. 재두루미도 생존하는 6천마리 중 2천여마리가 찾고 있는데 전 세계에서 두 종류가 함께 월동하는 곳도 여기뿐입니다."

그는 이곳이 새들의 천국이 된 것은 강원도 쌀의 4분의 1을 생산할 정도의 넓은 곡창지대로 먹이가 많은 데다 곳곳에 있는 지뢰지대와 비무장지대 일대에 삼림소택지.습지.초지 등이 최적의 자연서식지를 제공하는 덕분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주민들의 노력도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이곳에서 조류보호활동이 시작된 건 1988년부터. 야생사진 작가 등 11명이 모여 주로 사진을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알리는 작업으로 출발했다. 이회장이 이 일에 동참한 건 90년. 이곳에서 태어나 조그만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그에게 선배들이 "고향을 위해 좋은 일 한번 해보자"고 권유하면서였다. 워낙 활동성이 강한 때문에 2년 만에 협회 사무국장이 된 그해 12월 초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이른바 '열녀 두루미'사건이었다. 군인들이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중 70여마리의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 식음을 전폐한 채 1주일째 유난히 슬피 울고 있는 암두루미 한 마리를 발견했다는 신고를 받고 달려가보니 야생동물에게 잡아먹힌 남편 두루미곁을 지키며 탈진상태로 가끔 쉰 목소리만 내고 있었던 것. 회원 몇 명과 함께 밤을 도와 서울본부로 이송했다. 남편두루미는 남은 뼛조각 몇 개와 깃털을 수습해 전 해 샘통지역(철새도래지로 73년 천연기념물 제245호 지정)에 마련한 두루미 묘역에 묻어줬다.

"40여일간 치료 끝에 기력을 차린 암두루미가 다시 이곳으로 와 방사되던 날 2백여명의 참석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울었어요. 그 친구도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듯 우리 머리 위를 한바퀴 돈 뒤 사라지더라고요."

이를 계기로 단순한 순찰활동에서 벗어나 치료와 보호를 겸한 적극적인 활동을 펴던 중 95년 겨울 이번엔 독수리 22마리가 떼죽음으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대대적인 언론보도와 함께 회원이 아닌 주민들도 관심을 가지게 됐지만 이듬해 환경부가 자연생태보전지역으로 묶으려 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들의 활동에 역풍을 몰고 왔다. 가뜩이나 군사시설보호구역지정 등으로 제한을 받고 있는 터라 재산권 침해를 우려한 농민들이 "조류협회 때문"이라며 활동을 방해하고 나선 것.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결국 흐지부지됐지만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자연보호도 무의미하다는 교훈으로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회원들은 수의사 3명을 영입하는 등 마음을 더욱 다잡았고, 그 중심에 있던 그를 97년 회장으로 추대했다. 현재 정회원 52명, 준회원 50명을 이끌고 있는 이회장은 5개조로 나눠 수시로 종별 개체수 파악 등 모니터링을 통해 대책을 세운다. 98년부터 군의 지원을 받아 민통선 내 토교저수지와 강산저수지 인근 논에 곡류 30t, 육류 20t 가량 먹이를 주고 있는데 2000년부터는 7만평을 대상으로 철새들이 낙곡(落穀)을 먹을 수 있게끔 가을갈이를 하지 않도록 주민을 설득, 호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또 문화재청과 군으로부터 위임받아 천연기념물보호사를, 지난해 11월부터는 폐교를 임대받아 자연생태학습원을 운영 중이다. 특히 보호사에는 독수리.수리부엉이.황조롱이.붉은배새매 등 조류뿐만 아니라 멧돼지.오소리.고라니 등도 보호하고 있어 연간 5백여명이 찾는다.

"매년 1백50건 정도 위급한 환자들이 신고됩니다. 이 중 40%정도만 자연으로 복귀되고 나머지는 치료 도중에 죽거나 살더라도 자연사할 때까지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치료시설 부족으로 살릴 수 있는 것도 죽는 걸 봐야 할 때가 가장 괴롭고 힘들다"는 이회장-. 생업은 아예 부인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4년 전 철새를 따라 민통선 안으로 집까지 옮겼다는 그의 전생은 혹시 새가 아닐까.

글=이만훈 사회전문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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