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트는 시민의식(주권의식 확립위한 캠페인 선거혁명 이루자:2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금품·향응에 주권 잘못 사용말자/선거운동원의 타락부추김 특히 조심해야/김정욱교수 서울대 환경대학원
학교 다닐때 분단장도 한번 못해보고 기초의회가 뭔지,광역의회가 뭔지도 몰랐을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내가 우여곡절끝에 지난 광역의회 선거에 나갔다가 난생 처음으로 여러 계층의 시민들을 접해보았다.
그때 본 바로는 우리 사회에 여러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깊숙히 뿌리박혀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올바른 사회를 새로이 가꾸어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곳곳에서 움트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의 앞날을 희망적으로 본다. 먼저 부정적인 면을 보면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냉담하다는 것이었다. 투표장에 누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표찍겠다고 온 사람들은 그래도 다행이고 많은 사람들은 아예 「썩은 정치」에 말 그대로 무관심이었다. 처음 선거에 나갈 때에는 길에 벽보가 붙고 선관위에서 보내는 공보만 나가면 유권자들의 판단은 대개 끝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길에서 한가하게 벽보보고 있는 사람은 국민학교 학생들 빼 놓고는 몇사람 되지 않았으며 공보를 보고 나를 알았다는 사람도 별로 보지 못했다. 결국 개인 홍보물을 돌려야 하는데 이 홍보물마저 안 받거나 받아도 금방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홍보물을 한두시간 돌렸더니 온 지하철역 바닥이 내 홍보물로 뒤덮여 버린적도 있었다. 냉담한 사람은 전혀 탓할바도 아니었다. 선거운동원이라고 내뱉으며 멸시하는 사람,내 얼굴에다 담배연기를 훅 뿜어대는 사람,홍보물 나눠주는 손을 탁 때리는 사람,눈을 아래 위로 부라리는 사람,『돈이나 해처먹어라』『교수 망신시키고 있네』하며 욕을 퍼부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방색을 배제하기 위해 홍보물에 출신지를 알릴만한 사항을 집어넣지 않았더니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 중에는 고향을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우리 사회에 밝은 희망을 보여주는 징조도 많았다. 많은 후보들이 유권자들의 향응요구등쌀에 견디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겪은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한테 돈이나 식사대접을 요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 정치풍토가 쇄신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우리의 뜻을 듣고는 뜨겁게 호응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후원하였다. 문제는 시민들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이 시민들을 농락하는데 있었다. 꾼들을 풀어서 동네사람들을 몰아와 점심을 먹이고,내이름으로 식용유다 화장품이다 시시한 선물을 돌리고,우리집에 스파이를 붙이고,반상회 한다고 사람불러놓고는 흑색선전을 퍼뜨리는 판이었다.
흑색선전의 내용은 누구 오른팔이다,재야다,운동권이다,좌경이다,본처버리고 젊은 세컨드와 동거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우리 시민들의 약점은 공식적인 보도자료를 제대로 신용하지 않기 때문에 선거막판에 돌아다니는 소문을 믿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나를 아는 사람까지도 내가 재혼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난 줄로 알았다고 한다. 반상회를 통한 흑색선전은 나중에 한 시민을 통해 고발이 되었지만 50만원 미만의 벌금으로 판결이 났기 때문에 당락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선거막판에는 돈도 많이 풀렸다는 소문이 들렸다. 5만원 받았다는 사람도 만났고,10만원 받았다는 사람도 만났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중에는 표도 안찍어줬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할당받은 표수를 채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조직원들한테는 상당한 돈이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선되면 보너스를 지불하겠다는 약속까지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시민들은 타락한 정치에 식상하여 기권 하는 반면 조직원들은 그 「당근」을 먹으려고 열심히 사람들을 끌어모으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판국에서 무엇이 희망적이었는가 하면 전혀 돈도 없고 조직도 없고 선거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던 한 멍청한 시민후보를 이러한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많은 시민들이 있어 격려하고 선거비용을 후원하고 자원봉사 운동원이 되어 불가능하게 보였던 그 선거운동을 다 이루어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돈과 향응과 선심공약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거기에 무릎꿇지 않은 7천표가 있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곳곳에서 움트는 시민의식을 결집시켜서 타락한 농간을 이겨내고 결실을 맺게할 응집점이 없었다는데 있다. 시민들은 그런 응집점이 될 수 있는 시민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더럽다고 외면해서는 안되고 떠도는 흉칙한 소문따위에 귀기울일 필요도 없으며 불법을 보았으면 고발하는 수고도 아끼지 말아야한다. 선진국들도 예전에는 다 우리와 같았다. 그들의 지금과 같은 깨끗한 선거풍토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 뼈를 깎는 산고끝에 낳아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