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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의 삶 통해 전래 사상 재현|이재운 저 『소설 토정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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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동풍에 얼음이 풀리니/마른나무가/봄을 만나 도다/물이 성가에 흐르매/적은 것이 쌓여서 큰 것이 된다./좋은 꽃봄이 저물매/저물게 남쪽하늘인줄 알았다./낙양성 동편에/복숭아꽃 빛이 난다.』
정초에 본 토정비결에서 위와 같은 운수가 나온 사람은 내심 흐뭇해했을 것이다. 곤궁했던 삶이 차차 힘을 펴고 또한 공명도 얻을 괘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에 인생의 길흉화복을 비유해 쉽게 풀이해 놓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고 보편적인 역술서 『토정비결』을 남긴 토정 이지함 (1517∼1578)의 생애를 소설화한 『소설 토정비결』이 불티나게 읽히고 있다.
작년 11월20일 해냄 출판사에서 전3권으로 출간한 이 책은 현재 15판 30만부 가량 팔리며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1위로 올라섰다. 정초 들어 바람을 타기 시작한 이 책은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발간 2년만에 2백만부가 나가 「90년대 최대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소설 동의보감』을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
명문 양반 출신이면서 토정만큼 파격적이고 잡학 다식한 인물은 조선 왕조 5백년을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토정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그의 형 지번은 청풍 군수를, 지번의 두 아들 중 산해는 영의정을, 산보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명문가 출신이다.
토정은 또 당대 학문·정치의 중심 인물인 이율곡 등과도 절친한 사이여서 관계에 진출할 수도 있었으나 전도 양양한 사관이었던 친구가 사화로 처형되자 일찍이 명리를 초월한 인생의 길을 걷게 됐다.
토정은 일엽편주로 세번이나 제주도까지 갔을 정도로 조선 8도를 샅샅이 주유 했다. 그렇게 방랑하면서 토정은 각처의 풍수지리며 풍속·물산·인물 등을 두루 살폈다.
천하를 주유하며 보고들은 식견으로 하여 그는 천문지리·의약·산수·주역 등 잡학에 통달하게 됐다. 특히 양반이면서도 장사에 종사, 『허생전』의 모델이 되기도 한 토정은 최초로 시장경제의 원리를 시험해 본 경제학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경제사상은 말년 포천·아산 현감을 지내며 올린 상소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명문 양반 출신이면서도 장사나 하고 점이나 봐주고 떠돌아다닌 파격적 행동 때문에 그에 대한 일화들도 많다.
관도, 솥도 없어 외출 때는 쇠붙이로 만든 관을 쓰고 밥지을 때는 그것을 솥으로 썼다든 가, 엄동에 눈 위에서 잠을 자고 10여일씩 단식도 하고 또는 한끼에 한 말의 밥을 먹기도 했다는 등 도사풍 일화를 많이 남기며 그는 전설적 인물이 됐다.
『소설 토정비결』은 토정의 그러한 전설적 삶을 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노예 출신 승려 서기를 내세워 추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서화담·율곡, 그리고 상인 및 은둔 역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역학·성리학·경제학 등 잡학 다식했던 토정의 사상도 간추리고 있다.
당대 조선 8도의 풍속과 전설적 인물들이 자아내는 흥미와 적당한 사상적 교양 요소가 들어 있으니 이 책이 잘 읽힐 수밖에 없다.
작가 이재운씨는 40여권의 자료와 연구가들의 도움을 받아 토정의 삶과 사상을 재현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서구의 사상·종교관 앞에서 미신이나 단순한 흥밋거리로 매도당하는 우리 전래의 사상 철학이 지니고 있는 깊이와 폭의 진면목을 보여주어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시키려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역사소설로서 이 작품은 너무나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죽은 서화담의 화신과 8도 주유를 한다거나 기생 황진이가 수시로 등장, 뛰어난 방중술로서 토정 일행을 구해 준다든가 임진왜란에 대처키 위한 전국 역술인 대회 등 대부분의 삽화들은 차라리 소설이 아니라 허황된 옛날이야기로 작품을 몰고 간 감도 없지 않다. 특히 임진왜란의 전말을 철저히 역술에만 의존해 설명한 것은 역사의식을 떠나 상식 선으로서도 납득이 안된다. 그럼에도 이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것이 문제다.
김용덕씨 (중앙대 명예 교수)는 『봉건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가 첨예하게 드러나던 19세기 들면서 「토정비결」이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했다』며 그 이유를 「모든 것을 팔자로 돌리게 하는 부조리한 사회 풍토」에서 찾은 적이 있다. 역술의 원리를 피상적으로나마 드러내면서 거기에 의거, 옛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소설 토정비결』이 잘 읽히는 이유 또한 우리의 현 사회 상황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 친구 재수 없이 법망에 걸려들었어』라는 말이 다반사로 튀어나을 정도로 도덕·가치기준이 흔들리는 시대에 이 책은 가벼운 위안이나 흥미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독자들의 욕구에 편승, 역사나 사회의식은 저버린 채 역사상 인물들 을 흥밋거리로만 제공하려는 일부 출판사나 문인들의 지나친 상업성은 경계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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