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동독 미숙­조산아들 마구잡이 살해(지구촌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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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과거 비리 최근 속속 공개/구서독보다 신생아 사망률 낮추려 자행/1㎏미만은 무조건 익사·질식사/“독재의 반인륜적 행위”본격 수사
그간 베일에 가려져온 구동독시절의 각종 비리들이 최근 속속 공개되고 있는 가운데 구동독 산부인과병원들이 조산아·미숙아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이같은 행위가 구서독의 자본주의 체제보다 구동독의 사회주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법의 하나로 신생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사실은 독일의 시사주간 슈피겔지가 17일자 최근호에서 신생아 살해행위를 목격한 한 조산원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지난 60년대초부터 구동독최대 에어푸르트산부인과 병원에서 조산원으로 근무한 크리스티네 헤르스만은 이 잡지에서 몸무게 1㎏미만인 신생아는 출산직후 무조건 살해됐다고 증언했다.
방법도 잔인해 1㎏이 안되는 신생아가 태어나면 미리 물통을 준비,탯줄을 자르자마자 신생아가 첫 울음을 울기전 물통에 집어넣어 익사시키거나 상자속에 넣어 질식사시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의사가 분만용 집게를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태어난 한 신생아의 경우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의사가 「사산」이란 꼬리표를 붙여 유기하는 바람에 며칠만에 폐렴으로 죽기도 했다고 그녀는 밝혔다.
이같은 신생아 살해행위에 대해 에어푸르트산부인과 병원의 한 의사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구동독에서는 신생아 사망률이 낮아야만 했다. 실제로 구동·서독의 신생아 사망률은 오랜 기간 같은 수준이었다』고 말해 이같은 행위가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의사들은 구동독의 낙후된 의료기술·의료장비 부족으로 몸무게 1㎏미만의 미숙아가 생존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같은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현실 때문에 구동독에서는 몸무게 1㎏미만의 신생아가 설령 호흡하거나 심장이 박동해도 법적으로 「살아있는」것으로 간주되지 않아 이러한 신생아를 살해해도 유산 또는 사산으로 처리돼 처벌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같은 행위는 거의 모든 산부인과병원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행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슈피겔지의 보도에 대해 신생아 살해행위를 한 당사자인 에리히 바그너 전에어푸르트 산부인과 병원장은 TV에 출연,『법에의한 사망도 사망이다. 죽은 사람을 인간이 다시 죽일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자신의 행위에 하자가 없다고 강변했다.
그는 이어 『70년대말까지 구동독에는 조산아를 위한 현대식 인큐베이터 등의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에어푸르트 산부인과병원 뿐아니라 대부분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익사용 물통이 사용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베를린 슈테글리츠병원의 페르스몰트 교수는 『구서독에서는 호흡하지 못하는 조산아를 인공호흡을 통해 살려낸 경우가 있다』며 『생존 가능성을 신생아 체중 1㎏으로 잡은 것은 매우 낡은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도 미숙아의 생존 가능 한계체중을 5백g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이미 시작돼 관련자들의 유·무죄 여부는 결국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독재정권의 비호아래 가능했던 이같은 신생아 살해행위가 비도적적이고 반인륜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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