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대표팀 감독|부·명예 따르지만 "지면 역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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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만사 제쳐놓고 잠이나 실컷 자고 싶다.』
천신만고 끝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출전 티켓을 거머쥐고 난 후 한국축구 올림픽대표팀 김삼락 감독이 털어놓은 넋두리다. 화려한 스폿 라이트와는 달리 피를 말리며 노심초사하기 십상인 대표팀 감독자리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예다.
축구대표팀 감독-. 아마추어에선 최고의 영예로, 프로에선 부와 명예가 한꺼번에 주어지는 최고의 권좌다. 이 때문에 감독자리는 모든 경기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며 자연 이로 인한 감투다툼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둘도 없던 친구요, 가까웠던 선·후배사이가 대표팀 감독자리를 놓고 하루아침에 금이 가고 불편스러운 관계가 되는 것도 이 자리가 갖고 있는 매력 때문이 아닐는지-.
이 처렴 화려하고 영광스런 자리이지만 남모를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자리가 또한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잘하면 영웅, 잘못하면 역적』이라는 속설은 바로 이 같은 대표팀 감독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축구대표팀 감독은 사실 한국 축구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축구」라는 이름의 서양식운동이 이 땅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82년으로 추정되며, 본격적인 사회스포츠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의 일이다.
그러나 조선말기, 일정시대를 거치는 기간은 한국축구의 산 역사로 보기 힘들고8·15광복 후에 전개된 축구사 만을 한국 축구사로 정의하는게 통설로 돼있다. 48년 정부수립은 다른 종목과 마찬가지로 한국축구의 신기원을 이룩한 중요한 계기였음은 물론이다.
한국축구는 일면 감독의 컬러 또는 역량에 따라 크게 높낮이를 반복해왔다.
해방 후 첫 축구대표팀 사령탑에 취임한 공식1호 감독은「영국신사」로 불리는 박정휘씨. 경성제대 출신인 박 감독은 오랜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나 그제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보성전문-연희전문 틈새에서 능력을 발휘, 한국축구를 떡 주무르듯 요리했다. 당시 박 감독이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한국축구의 런던올림픽 행을 실현시킨 일화는 지금까지 축구계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축구팀파견에 모두 회의적이던 판에 박 감독이 총대(?)를 메고 경무대로 직행, 이대통령에게 간청한 끝에 결국 런던 행을 승낙 받았던 것.
비록 런던올림픽에서 갖은 수모를 당한 끝에 예선탈락하고 말았지만 한국축구의 올림픽출전은 박 감독의 숨은 공로에 힘입은 바 컸다. 당시 코치는 한국축구 대부 격인 김용식씨. 주장은 박대종씨며 GK는 홍덕영씨였다.
당시 일화 한토막. 대 스웨덴 전에서 경기 중 한 선수가 상대방선수의 깊은 태클로그라운드에 쓰러져 주심이 그라운드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하자 주장 박대종이 달러와 대뜸『노 터치, 히 이즈 마이 프렌드』라며 엉터리영어로 항변했다고. 그때 만해도 제대로 규정조차 몰라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유형씨는 현역시절 경성 축구대표를 지낸게 인연이 돼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훗날 서울신문 체육부장을 지내 문무를 갖춘 인텔리 감독으로 성가를 떨쳤다.
58년 동경아시안게임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근찬씨는 유도인 출신으로 만능스포츠맨으로 통했고, 그 뒤를 이어 축구 감독이 된 김용식씨는 36년 베를린올림픽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대표로 출전하는 등 기량이 출중한 축구인 이었다. 그러나 워낙 성품이 유아독존 식이어서 그리 평판이 좋지는 않았다는 평. 김 감독은 평양출신(김일 두목사의 외아들)으로 40세까지 현역선수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 60년 로마올림픽예선에 한국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도중하차하고 말아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후 간도출신의 부호(피복협동조합이사장) 이종갑씨, 한국제일의 거구 민병대씨가 잇따라 뒤를 이었으나 역시 단명에 그쳤고,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정국진씨가 대물림해 64년 동경올림픽 본선무대에 나가는 쾌거를 이룩하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감독직은 행정가의 범주에 머무르는 수준이었고 실제적인 작전권은 코치가 맡아 게임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감독이 무보수 명예직이었음은 특기할만하다.
68년 새 축구협회장에 장덕진씨(당시 재무부차관보)가 취임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축구 감독의 자리는 전적으로 경기인 출신으로 넘어가 행정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자연히 보수가 많은 명예직이 되기에 이른 것. 축구 감독직을 놓고 경기인 들간에 아귀다툼을 벌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고, 감독직이 정치 색을 띠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감독은 한홍기씨. 대한중석에서 선수생활을 한 한 감독은 사리가 밝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 장회장의 신임을 받았다.
상비군제도가 도입돼 청룡·백호로 나뉘어 대표팀을 이원화 한것도 특기할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한 감독은 72년 뮌헨올림픽 예선탈락으로 2년만에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리더십이 뛰어난 감독으로는 박병석 감독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함흥철씨. 함 감독은 당시 흐트러진 팀워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천거되었으나 5개월의 단명에 그쳤다.
이론가인 후임 최영량 감독은 선수출신으로 대학교수(경희대학장)에까지 오른 실력파이나 성품이 지나치게 깐깐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최 감독은 억울하게 대표팀을 물러났다.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때 예선리그에서 한국은 쿠웨이트에 이길 경우 준결승에서 북한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같이 되자 정치인인 김택수 당시 체육회장은 고의 패배를 지시했다(패할 경우 후유증을 피하기 위해). 사기가 꺾인 선수들은 전력상 이길 수 있는 경기를 격국 4-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결국 파장이 커져 귀국 후 최 감독이 퇴진하게 된 것이다.
그 뒤 함흥철씨가 잠시 맡았던 대권을 이어 잡게된 문정식씨는 리더십결여로 잦은 마찰 끝에 1년만에 물러났고「아시아의 황금다리」로 당·대를 풍미한 스타출신 최정민씨가 대를 이었다. 미스코리아부인을 맞아 화제를 뿌렸던 최 감독은 주색에 능한데다 섭외력이 가위 발군이어서 감독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전무로 통했을 정도. 별명이「마당발」로 장안에 술값 외상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
최치환 회장 밑에서 잠시 감독을 지낸 장경환 감독은 비사교적으로 우직하게 감독 일에만 매달리다 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탈락으로 사리를 떠났고, 이어 김호와 함께 아시아의 철벽수비를 자랑하던 명 스위퍼 출신 김정남씨가 지휘봉을 넘겨받았다. 한양공고 3년 때 이미 태극마크를 달았던 김 감독은 은퇴 후 호주유학을 다녀와 오랫동안 함흥철·문정식 감독 밑에서 코치수업을 쌓아왔다. 82년 스페인월드컵 예선탈락으로 김 감독대신 학교선배인 최은택씨가 사령탑을 맡아 뉴델리 아시안게임을 치러냈으나 최 감독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최 감독은 서독유학까지 다녀온 이론을 겸한 지장이었으나 아시안게임실패에 따른 여론의 화살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 후임에 조윤옥 감독이 취임했지만 그 역시 단명에 그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국축구는 새 전기가 마련됐다.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한국이 일약 4강에 오르자 축구계의 이목은 온통 신화창조의 주역인 박종환 감독에 모아졌고 박 감독의 대표팀 인수는 자연스레 진행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표명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축구광인 전전대통령은 운동장에 전화를 걸어 작전지시(?)까지 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러나 오래 계속될 것으로 보이던 박김독 체제는 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예선탈락의 충격 속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별수 없이 문정식 감독을 복귀시킨 한국축구는 새 멕시코월드컵예선만을 치른 후 다시 지휘봉을 김정남 감독에게 넘겨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김 감독이 86서울아시안게임 후 물러나자 박 감독이 절치부심, 컴백했으나 박 감독은 김우중 회장의 지원부족을 이유로 돌연 사퇴해 협회는 어쩔 수없이 김정남 감독을 다시 내세워 88서울올림픽을 치러낸다.
그 뒤를 이어「풍운아」이회택 감독이 지휘봉을 잡아90년 로마월드컵예선 및 본선무대에 진출함으로써 한국축구의 위세를 떨치게 된다. 이 감독은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연결하는 인화력과 리더십이 두드러졌다는 평가다.
월드컵 후 감독의 자리는 이차만 대우 감독을 거쳐 박종환 감독이 다시 맡아 북경 아시안게임·남북통일축구를 치렀고, 90년12월 스페인 올림픽에 초점을 맞춰 신진주축의 대표팀을 구성하면서 청소년대표팀 감독출신의 김삼락 감독이 전격적으로 대표팀사령탑에 취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칫하면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축구대표팀 감독은 잘하면 영광은 선수에게, 못하면 책임은 자신이 도맡는 경우가 허다한 자리다. <전종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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