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로 해결하려는 세태/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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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름다운 사랑을 죽음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비극,비극적인 죽음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햄릿』등 그의 4대비극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 까닭은 그들 남녀 주인공의 죽음을 비극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한사람의 죽음으로 다른 한사람의 삶은 의미가 없어졌으므로 따라 죽은 것은 당연하며,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맺게 되었으니 아름답지 않느냐는 논리다.
○이기주의의 표본
이처럼 죽음을 아름답게도 볼 수 있는 논리는 그 죽임이 자살인 경우에만 해당한다. 병으로 죽었거나 사고로 죽었거나 혹은 남의 손에 죽은 경우를 놓고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살예찬론을 펼치는 예술가들도 적지 않지만,그러나 죽음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뒤에 던져질 갖가지 파장을 감안한다면 「아름다운 죽음」으로 간주될 수 있는 죽음,곧 자살의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얽혀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죽음 그 자체가 비극이라는 점에서도 자신의 죽음은 자기만의 비극일 뿐 타인과는 무관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사람의 자살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이기주의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자살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끝,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 자살유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비관자살의 경우를 보자. 비관의 이유도 못생겨서,결혼을 못해서,소외감 때문에,취직을 못해서… 따위로 다양하지만 그 동기야 어디있든지간에 그들의 죽음이 비관을 청산해 주었으니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끝이고 해결된 것일까. 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일평생 못을 박게 된다는 사실을 한번쯤 염두에 두었을까.
최근에 있었던 몇몇 젊은 남녀의 자살도 그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음미해 볼만하다. 동거하던 남녀대학생이 집안에서 헤어지라고 종용하는데 비관,잇따라 목숨을 끊은 사건과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교사가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그것이다.
○도피성 죽음일 뿐
보기에,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순애보」식의 감동적인 죽음으로,혹은 『로미오와 줄리엣』류의 아름다운 죽음으로 칭송될만한 소지도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삶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죽음은 분명 이기적인 죽음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나 하나만 죽으면 그만이다』는 보편화된 사고방식이다. 더욱 두렵고 비극적인 것은 그같은 사고방식이 한걸음 더 발전하게 되면 『죽으려고 맘 먹으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꼭 알맞는 경우를 우리는 지난해 10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발생했던 자동차폭주 살인사건에서 경험한 바 있다. 20대의 소외계층으로 시력도 극도로 나쁘고 따라서 취직에도 여러차례 실패했던 범인은 막연하게나마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고,막상 죽음을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단계에 이르렀을때 그의 생각은 엉뚱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막상 죽으려고 하니 나혼자 죽기는 억울해 여러사람을 죽이고 죽으려 했다』는게 그의 범행동기였던 것이다.
한사람이 세상을 원망하고 비관한 나머지 자살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그처럼 엄청나고 끔찍한 사건을 유발한 동기가 되고 있음은 자살의 파장이 얼마만큼 확대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격도 다르고 경위도 다르지만,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김기설씨의 분신자살사건과 서울신학대 경비과장의 자살도 단순히 「자살」이라는 측면에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김기설씨의 경우 그의 자살이 제3자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는지,자발적인 것이었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진정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의 죽음을 평가절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뒤에 새롭게 제기된 여러가지 문제들이 새삼 그같은 의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가장 비겁한 행위
경비과장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의 자살로 후기대 입시문제지 도난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가 미궁속에 빠져있다. 그가 범행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든 없든 그는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끝나고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자살이 「뜻없는 죽음」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그 뒤에 던져진 파장이 이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휘몰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떳떳지 못한 죽음의 예에 꼽힐만 하다.
인간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거나,이세상이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냐 아니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끝도 아니고 해결도 아니라는 점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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