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땅주인 땅땅거리다 "기죽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1면

"제발 땅 좀 사 주세요." 요즘 서울 강남권 등에서 땅 주인들이 건설회사.시행사(실질적인 사업주체로 땅을 매입한 뒤 공사는 건설회사에 맡김) 등에 하는 얘기다. 그동안 아파트나 빌라 등을 짓기 위해 건설회사.시행사가 땅 주인에게 공을 들였다면 지금은 그 반대다. 일부 땅 주인은 회사를 찾아와 '빨리 사가라'고 매달린다. 10.29 대책 이후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면서 사업자와 서울 강남 등지의 주택.토지 주인들이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주로 강남에서 빌라사업을 하는 M시행사는 요즘 달라진 환경을 실감하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의 집주인 서너 명이 회사를 직접 찾아와 이 일대 땅들을 매입해 달라고 의사를 타진해온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1종 일반주거지역인데 평당 1천5백만원에 사달라고 하더라"며 "얼마 전까지 강남에 땅이 한 평만 있어도 안 팔겠다고 버티거나 터무니 없는 값을 요구해 애를 먹었는데 상황이 역전됐다"고 말했다.

상반기만 해도 평당 3천5백만원을 호가하던 강남구 삼성동의 업무시설 부지의 경우 평당 2천5백만원으로 떨어졌는데도 팔리지 않자 땅주인이 "얼마면 사겠느냐"며 시행사를 찾아다닌다.

이처럼 땅 주인들의 위세가 한풀 꺾인 것은 10.29 대책 후 아파트 등의 분양시장이 얼어붙자 땅값으로 승강이를 벌이던 시행사들이 자취를 감추고, 건설업체들도 잇따라 사업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공격적인 수주 활동으로 소문난 P건설은 최근 심도 있게 검토하던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주거용 오피스텔 부지를 비롯해 2~3건의 신규 사업을 잇따라 포기했다. 이 회사 수주담당 부장은 "10.29 대책 이전 분양가로는 사업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값에 분양하기 쉽지 않아 손을 뗐다"며 "앞으로 채산성이 보장되는 곳만 선별 수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확보한 사업 시행권을 넘기려는 시행사도 있다. 대구시 수성구 노변동.범어동에서 각각 일반 아파트와 주상복합아파트를 지으려던 두 시행사는 최근 투기과열지구 지정에 따른 분양시장 침체 등의 이유로 시행권을 매각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여름 서울 서초동에 상업용지를 매입한 한 시행사도 지주들이 땅값을 깎아주지 않으면 조만간 제3자에게 넘길 계획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꿈쩍하지 않던 강남 등지에 있는 인기 사업부지의 땅값도 떨어지고 있다. 강남구 청담동에서 빌라나 일반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2종 일반주거지역의 경우 평당 2천5백만원 선이던 땅 값이 현재 실거래가 기준으로 평당 1백만원 정도 내렸다.

C시행사 관계자는 "종전에는 땅 주인이 부르는 게 값이었지만 시행사들이 발길을 끊자 오히려 지주들이 불안해 한다. 최근엔 협의매수가 가능할 정도"라고 말했다.

주상복합아파트 부지인 서초동의 한 상업용지 호가도 지난 9월 평당 3천8백만원 선에서 평당 1백만원 정도 내렸다. 미래A&C 이월무 대표는 "땅값 하락폭은 그동안 오른 것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수준"이라며 "하지만 개발수요가 줄면 아무리 강남권이라 해도 가격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미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