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과 노인(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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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노인이 나이 70이 됐다. 그 아들은 고려장풍습을 따라 아버지를 지게에 져다 산속에 버렸다.
지게도 함께 버리고 가려 하자 뒤따라 왔던 어린 손자가 그 지게를 지고 나섰다. 아버지가 『지게를 왜 가져가려 하느냐』고 묻자 아들은 『아버지도 늙으면 지게로 져다 버려야 할 테니까요』라고 답했다. 그는 어린 아들의 대답에 크게 뉘우치고 늙은 아버지를 집으로 다시 모시고가 잘 봉양했다.
늙은 부모를 산채로 버리던 고려장의 악습이 없어지게된 유래와 관련한 「기노전설」의 또 한가지.
고려장을 할때가 됐지만 차마 그럴수가 없어 국법을 어기면서 몰래 숨겨두고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효자가 있었다. 중국에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해 온 나라가 전전긍긍할때 그 노인의 지혜로 문제를 무난히 해결했다.
이 설화는 노인의 지혜에 담긴 높은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지난날의 미개사회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생산능력이나 육체적인 힘 위주로 평가해 노인들을 천대했다. 고구려때 노인들을 광중에 버려두었다가 죽은뒤 장사를 지낸 풍습,또는 고구려전의 부여시대 순장에서 비롯됐다는 두가지 속설이 있는 고려장은 고대 미개사회가 가지고 있던 이같은 노인천시 가치관을 잘 반영하는 악습이었다.
오늘부터 2천만명이 대이동하는 「설귀성」이 시작됐다. 푸근히 내린 서설속에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고향을 찾아가는 행렬은 보기에도 흐뭇하다.
이번 설에는 교통지옥을 뚫고 달려가는 고향마을에 꼭 경로의 씨앗들을 뿌려놓고 오자.
푸짐한 선물도 좋다. 그러나 시골을 외롭게 지키는 늙은 부모님과 동네 어른들의 정신적 고독을 잠시라도 푸근히 메워주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핵가족 시대에 떼밀려 「방치상태」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인 수많은 노인들의 신세는 신판 고려장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정부는 경로사상고취를 위해 노부모 부양가구에는 주택융자금을 5백만원 더 늘려주어 3천만원까지 대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경로나 효의 근원적인 문제는 단순한 물질적 풍요로만 해결되진 않는다.
이번 설을 계기로 경로효친의 미풍을 되살리는 진짜 국민운동이 일었으면 싶다.<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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