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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오키나와 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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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철의 폭풍'(Typhoon of Steel)이란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오키나와(沖繩) 전투가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했는지를 대변해 주는 표현이다. 미군이 3개월 동안 인구 45만의 섬에 포탄 8만 발, 수류탄 39만 발, 기관총탄 3000만 발을 퍼부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총.포탄의 폭풍우였던 셈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민간인 희생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미군 1만2000명, 일본군 6만5000명이 전사한 데 비해 민간인은 9만4000명이 숨졌다. 이름이 확인된 한반도 출신 희생자도 430명에 이른다.

이는 일본 군부가 현지 주민을 총동원한 옥쇄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미군의 일본 본토 진공을 하루라도 늦춰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심지어는 중학생까지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란 이름으로 전투에 나갔고 여학생들은 동굴 속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히메유리 간호대'에 동원됐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집단 자결'이었다. 당시의 일본 군인들뿐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적전(敵前) 투항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포로가 되기보다는 깨끗하게 목숨을 버리는 것이 황국신민의 도리라는 군국주의 가치관에 세뇌돼 있었기 때문이다. 용케 목숨을 건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이 수류탄을 두 개씩 나눠 주면서 하나는 미군 공격용, 나머지 하나는 자결용이라고 공공연히 얘기했다고 한다. 오키나와현의 자체 조사에서는 적어도 7곳에서 수십~300명씩 집단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휘관이 직접 자살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60여 년간 주민들과 현지 언론, 연구자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통설이다.

그런데 내년부터 사용되는 일본의 고교 교과서에서 집단 자결에 군의 강요나 관여가 있었다는 표현이 일체 사라지게 됐다.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종래의 표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유로는 "증언이 있긴 하지만 이설(異說)도 있어 군의 자결 명령이 있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논리다. "증언은 있지만 공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정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논법과 어쩜 그렇게 흡사할까. 역사 교과서 개정을 주장하는 우익 논객들이 2005년께부터 조직적으로 집단 자결 문제를 거론하고 나선 것도 우연의 일치로는 보기 어렵다. 위안부와 오키나와에 이어 다음엔 또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나올지 모르겠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