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도레이새한 - 화합으로 뽑아낸 화학섬유 최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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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이영관 사장

도레이새한 이영관(60) 사장은 지난해 11월 서울 양재동 KOTRA 본사에서 열린 외국인 투자유치 성과보고회에서 큰 칭찬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설 중에 도레이새한 이 사장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한국에서 기업경영을 통해 한국 경제에 크게 기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도레이새한은 한국 섬유산업 사상 최대규모인 5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1999년 설립된 기업이다. 현재 일본 도레이가 90%의 지분을 갖고 있다.

지금은 성공적인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유명하지만 설립 초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화섬협회에 가입하려 했지만 외국계 기업이라는 이유로 일부 회원사들이 반대해 애를 먹기도 했다. 결국 이 사장이 직접 뛰어다니며 "외국 기업이지만 생산도 한국에서 하고, 세금도 여기서 낸다"고 설득한 끝에 회원사가 될 수 있었다.

설립 당시 이 회사는 적자였다. 새한에서 인수한 사업은 연간 400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 사장은 저수익 제품의 비중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사업 구조를 바꿔나갔다. 도레이의 첨단 기술을 도입해 제품의 부가가치를 더 높일 수 있었다. 도레이의 글로벌 판매망도 적절히 활용했다. 덕분에 기존 동남아 위주의 수출을 미국과 일본.유럽 등으로 바꿀 수 있었다. 선진국에 파는 만큼 제품을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그 결과 경영 1년 만에 회사를 흑자 기조로 바꿀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최근 3년간 6000억원대의 매출과 40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꾸준히 내고 있다.

◆IT소재 기업으로 변신 중=이 회사는 화학섬유업체에서 정보기술(IT)소재 기업으로 변신 중이다. 올해 매출 목표 7700억원 가운데 IT 소재 분야에서만 1400억원을 벌어들일 계획이다. 이 회사가 IT소재 분야에 처음 진출했던 2002년 이 분야 매출은 66억원에 불과했다. 그랬던 IT소재 분야 매출이 20배 이상으로 성장한 셈이다. 환경 산업에도 뛰어들었다. 원유가 아니라 옥수수를 발효시켜 합성수지를 만드는 생분해(PLA) 수지 사업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공장을 착공해 올해 본격적으로 공장을 돌릴 계획이다. PLA 수지는 곡물 메이저 카길의 자회사인 네이처웍스로부터 공급받는다.

주력사업인 폴리에스테르 필름사업도 7년간 50% 커졌다. 폴리프로필렌 부직포 사업도 아시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본사가 아니라 도레이새한이 직접 중국에 600억원을 투자해 공장을 건설 중이다. 이 사장은 "2010년엔 매출 1조원과 영업이익 1200억원의 초우량 IT소재기업으로 변신할 것"이라며 "일본 본사에서도 한국 자회사를 '제 2의 도레이'로 키우고 있다"고 했다.

◆9년 CEO의 비결=이 사장은 99년 회사 설립 당시부터 9년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외국계 기업에서 이런 '장수 CEO'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 사장은 2003년부터 모기업인 일본 도레이의 상임이사도 맡고 있다. 해외 현지 경영인이 도레이 본사의 임원을 맡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홍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이 사장은 73년 제일합섬에 입사해 구미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83년 현장 과장 시절, 당시 삼성과의 합작사였던 도레이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로 도입한 신기술 설비를 만들기 위해 15일간 밤낮없이 일하는 그의 모습을 도레이 기술진이 눈여겨봤던 것이다. 97년 제일합섬이 새한으로 사명을 바꾸고, 99년 일본 도레이가 새한의 자산 일부를 넘겨받아 도레이새한을 세우는 격변의 시기에도 항상 그는 중용됐다. 이 사장만큼 구미 공장과 제품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정된 노사관계도 큰 힘이 됐다. 이 회사 노사는 설립 이후 무분규로 임단협 타결을 이어가고 있다.

이 사장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선.후배들과 본사가 도와준 덕분"이라고 겸손해 했다. 그는 "비즈니스는 1~2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단기 실적에 너무 연연해 하는 관행은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중장기적인 시각으로 CEO를 평가하는 도레이의 '긴 호흡'은 장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경영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마에다 가쓰노스케(前田勝之助) 도레이 명예회장이 평소 강조했던 리더십.선견지명.균형감각을 들었다. 이 사장은 "가족 같이 편안하게 직원을 대해야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지만물 가운데 '화(和)'가 근본이라는 공자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담고 다닌다. 그는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직원이 가장 싫다"며 "계속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글=서경호 기자<praxis@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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