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0·27법난 종교수난(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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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X-제45작전. D데이H아워는 1980년10월27일 미명의 새벽 4시였다. 무장한 합수부요원들이 조계종산하의 전국사찰에 일제히 들이닥쳤다. 전투에 승리한 군대가 적의 진지를 접수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광경이었다.
법당 불상의 좌복까지 훑어내는 삼엄한 수색 끝에 수많은 승려와 민간인이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그 하루전인 26일 오후에는 군버스를 타고 온 일단의 보안사요원들이 조계종총무원을 덮쳐 송월주 원장이하 부장급스님 5∼6명을 연행해갔다.
이때 계엄군에게 연행 또는 소환돼간 인사는 승려와 민간관련인을 합쳐 모두 1백53명. 직접 혐의가 걸린 사람이 55명, 나머지는 참고인이었다.
전국 사찰에 대한 이 같은 대대적인 수색과 불교인 연행사태를 놓고 당시 계엄사당국은『불교도량이 사이비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무·발호하는 비리지대화해 국민적 지탄과 빈축의 대상이 되고있음에도 불교계 자체의 자율적 정화나 숙정 움직임이 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므로 부득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조치를 취하게 된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사가 일단락되고 그 전모가 밝혀진 것은 11월14일이었다. 계엄사측은 이날 『승려 등 1백53명을 연행 또는 소환해 수사를 편 끝에 교계내의 각종비리에 직접 관련된 승려 10명, 일반인 8명 등 18명을 구속·형사입건하고 32명은 불교정화중흥회의 자율정화위에 처리를 맡겨 승적박탈(체탈도첩·제적)·종직사퇴(공권정지) 등의 중징계에 처하도록 했으며 혐의가 없는 5명은 훈방했다』고 발표했다. 계엄사는 또 수사결과 비리승려들이 부정치부 사유화한 각종 재산이 2백억6천만원에 이르며 이중 4억6천만원 이상이 불법 유용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당시 계엄사의 수사발표문이 열거한 승려들의 비리 및 부정유형은 ▲종권장악을 위한 파벌간 암투와 폭력행위 ▲음주·사음 등 퇴폐행위 ▲주지임면을 둘러싼 금품수수행위 ▲사찰재산의 착복 및 유용행위 ▲각종 불사에 얽힌 부정행위 등 무려 12가지나 됐다.
유형별로 사례도 적시됐다. 체탈도첩된 무적승려이면서 6개의 개인사찰과 신문사경영으로 무려 1백78억원을 축재, 「목탁재벌」의 본보기가 된 스님이 있는가하면, 환속 후의 생활대책을 위해 사찰공금을 무단유용하고 개인사찰건립·회사설립·부동산매입·요정경영 등을 통해 17억5천만원을 축재했다는 스님의 경우도 있었다. 어엿이 처자까지 둔 몸으로 인기연예인·호스티스·여신도들과 호텔을 드나들며 온갖 사음퇴폐행위를 일삼아온 스님의 이야기도 예시됐다. 「낮에는 주지 밤에는 요정경영인」. 이것이 당시 계엄사의 발표내용을 전하면서 어느 신문이 붙여놓은 해설기사의 표제였다.
계엄사의 수사요원들에게 붙들려간 사람들은 취조과정에서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사관들은 미리 확보된 자료를 근거로 『비리나 범죄사실을 순순히 털어 놓으라』고 윽박질렀고 부인하거나 조금이라도 각본에서 벗어난 대답을 하면 당했다.
계엄당국이 사회정화의 차원에서 행했다는 이 일을 두고 불교계는 그와는 정반대의 시각에서 「경신10·27대법난」이란 말로 부르고 있다. 「법난」이란 권력자에 의해 불교가 부당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을 때 붙여지는 역사적 용어다. 중국불교사에서 보는 소위 「삼무일종」의 폐불법난이 그렇고 우리 나라에선 조선조 태종·연산군 때 억불국시의 일환으로 자행된 불교탄압을 법난의 대표적인 예로 친다.
80년 10·27사태를 희유의 일대법난으로 기억하는 불교인들은 그 때문에 당시 계엄사가 발표했던 승려들의 비리와 갖가지 부도덕한 혐의사실들이 일정한 목적에 맞춰 어거지로 조작된 것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수사당국이 조사를 위해 사전 확보한 근거자료는 그 무렵 국보위 민원실에 접수돼있던 교계관련 투서와 유인물들이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종단주변에 기생하면서 분규에 이해를 걸고 악명을 떨치던 일부인사들이 풍문만을 듣고 그럴듯하게 작성해 보낸 음해문서였다.
그렇다면 계엄당국이 10·27법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불교가 정통성의 위기를 넘기기 위한 군부정권의 희생양으로 선택됐기 때문이라는게 많은 사람들의 견해다. 송월주 체제가 강력히 자주와 개혁을 표방하고 나서자 대불교정책에 어려움을 예상한 5공 세력이 이를 뒤엎을 필요가 있었고, 때마침 거세게 일고있던 국민의 민주화열기를 진정시키면서 이들의 시선과 불만을 다른데로 옮겨야할 절실한 내적 동기에 쫓겨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약하고 만만한 불교계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불교가 당국에 폭력행사의 명분을 줄만큼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이 멋대로 10·27법난과 같은 「본때보이기」의 무리수를 둔데 대해서 그 당위성에 동의하거나 납득의 표정을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상처는 컸으며 부정적이었다. 불교계에 억울한 사람을 양산해내고 신원을 위한 시비 가름이 줄을 이으면서 그후의 교계를 크게 혼란으로 이끌었다.
당시 보안사에 연행돼 23일동안 갇혀있다 나온 송월주 스님의 말처럼 10·27법난은 『멀쩡한 사람 배를 갈라 수술을 하려다 정작 병후를 발견 못해 서둘러 봉합해버린 꼴』이었던가. <정교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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