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역사·문화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역사시대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를 보는 시각도 다를 만큼 남북문화는 이질화되어 있다. 이데올로기가 과거를 보는 눈까지 바꿔 놓은 것이다.
한민족의 기원에서부터 국가의 법통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은 철저히 달라져 있다. 역사의 편년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통일 전에 좁혀야 될 거리가 큰 것이고 교류의 필요성이 절실한 것이다.

<역사>
남북의 역사는 한민족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 정도로 이질화돼 있다.
우선 역사를 보는 눈, 즉 사관부터 현격한 괴리를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사관은 마르크시즘의 역사원리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보다 심각한 괴리는 주체사관이라는 돌연변이가 엄연한 정통사관으로 유물사관보다 더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60년대 이전까지 북한의 사학이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고 말한다.
해방직후 사학계의 거물이었던 홍명희·백남운 등이 월북, 북한 사학을 일궜기 때문이다. 뒤이어 북한사학계를 이끈 김석형·박시형·홍기문(홍명희의 장남) 등도 월북인사들이다.
하지만 북한 사학은 55년 김일성의 『사상사업에서의 주체확립』교시에서부터 주체사관이 강요되면서 역사학으로서의 발전이 지체된다.
현대사의 기점을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한 1926년으로 묶어둔 상태에서 현대사연구가 발전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예각으로 마주치는 부분은 남북국가의 정통성문제다. 남한은 3·1운동정신에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하고 고대사에 있어서도 신라를 강조한다. 반면 북한은 고구려의 후손으로 항일빨찌산투쟁의 법통을 강조한다.
간극이 크다고 메우지 않을 수는 없다. 가장 확실한 원칙은 인적 교류다. 남한학자들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북한의 역사연구 성과들을 접해왔다. 북한학자를 만나 본 사람들에 따르면 『그들은 우리의 연구성과를 소상히 알고 있더라』고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만나서 토론하는 것이다. 제3국 주최 학술회의에서의 일시적 만남이 아니라 남북역사학자간의 지속적 교류가 필요하다. 다양한 역사해석을 하나로 묶기는 힘들더라도 통일국가의 후손들에게 가르칠 역사교과서는 준비해야할 것이다.

<문화재>
해방이후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의 유적 발굴 조사가 남한을 훨씬 앞서 있었다.
북한의 문화재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유능한 학자들의 대거 월북에도 힘입은 바 있지만 북한의 주체성·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60년대 중반이후 이러한 상황은 뒤바뀌어 현재는 남한이 월등한 입장에 있다.
별도로 진행된 남북한의 고대사 연구는 한민족의 기원을 북한은 7천년 전, 남한은 8천년 전으로 잡고 있는 등 편년에서 보통 1천∼2천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북한 문화재 교류에 대해 임효재 교수(서울대)는 『우선 삼국시대 유물전 같은 전시회를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어 한민족은 단일 문화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이 같은 물적 교류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다음 단계에서 인적 교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북한에서의 연구는 고구려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한에서는 신라·백제가 중심이 되는 등 남북한의 시각차이가 적지 않다』고 전제, 『최근 북한에서도 괄목할만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어 합동발굴 및 연구 등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부터 북한문화재연구위원회를 16명으로 구성, 정기적인 회의를 갖고 북한의 자료 및 연구성과에 대해 논의하는 등 남북한 문화재교류에 대비하고 있다.
문화재연구소는 이와 함께 북한 도서 5백여점, 슬라이드·필름 등 사진자료 2천5백여장 등도 확보하고 있다.
정재훈 문화재관리국장은 『북한은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연구 체제이기 때문에 문화재 부분에 관한 학술적인 교류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물·명승지 등을 대상으로 하는 교류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가장 손쉬울 것』이라고 제시했다. <김상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