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유동현(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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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최씨:순분이 말이 맞아! 남자가 여자를 공격할 때는 적극적으로 즉, 여자가가 든듬함을 가지도록 말야. 그렇게 프로포즈를 해야지. 비밀로 해주세요. 그런 소심한 남자를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나? 비록 딱지 맞는 한이 있어도 카랑카랑 소리를 내어 사람을 고백하라구.
순분:어머! 아저씨총각 때 둥이셨나봐!
최씨:둥이? 둥이가 뭐지?
순분:바람둥이! 호호호.
최씨:(뻐긴다) 좀 날렸지. 지금이야 푹 쭈그러들고 탄가루 뒤집어써서 볼품없지만, 옛날에는 여자들 가슴깨나 울렁거리게 했지. 거 뭣이냐. 넥꼬다이 딱 매고, 검정양복을 풀질해서 반질반질 다려입고, 검정비닐구두를 걸레로 반질반질하게 닦고서 길을 나서면 지나가던 여자들이 넋을 놓고 쳐다봤다고. (도취된다) 포마드 기름을 바른 머리결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날 때면 한숨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여자들이 줄줄 따라왔지. 아! (생각에 잠긴다) 그때…!
강호:훗!
순분:호호!
최씨:믿지않는건가 !
강호:어? 아, 아닙니다!
순분:아이-, 아저씨도 참. 지금 아저씨 얼굴 윤곽을 보니까 정말 미남형이에요. 그 짙은 눈썹이 더욱 매력적이구요. 어머! 힘차고 굳건하게 내리 뻗은 이 코! 멋지셔! 참 아깝다.
최씨:뭐가?
순분:내가 이십년만 먼저 태어났어도…! 아! 아저씨! (뒤에서 껴안는다) 사랑했을 거예요.(강호에게 눈짓) 정말이에요….
강호:(큭큭 웃는다)
최씨:(싫지는 않은 듯) 흣흐. 거짓이라도 기분은 좋구만.
순분:(팔을 풀고 어깨를 탁치며) 진짜래두요옹.
최씨:됐어. 됐구먼. 그만 놀려. (사이) 비록 철새처럼 날아와서 둥지를 튼 우리지만 생사고락을 같이 했잖아. 강호 자넨 잘 모르겠지. 순분이도. 처음 여기왔을 땐 집이 한 채도 없는 산이었어. 읍네도 허름했고 회사에서 임시로 만든 판자집에서 몇 가족이 살았지. 그러다가 집이 완성되어 지금 마을 형태로 됐지만. (사이) 그런 우린데 정들이 남 같았겠어. 큰소리·싸움 한번 없었어. 화절령은 그런 곳이라구. 철새도 날아와서 떠나기 싫어하는, 작은 대소간의 일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았지. 그런데 더욱이 처녀총각의 일인데 비밀이라고? 그건 광포를 해야지.
강호:아저씬…(순분의 눈치를 살피며)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
순분:맞구먼요. 난 꿈도 꾸지 않은 일인걸요, 뭘.
강호:(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인다)
최씨:(강호 손을 잡는다. 나지 막히) 바보같이, 사내가! 날 믿어. 내가 해결해 줄께.
강호:(가볍게 한숨 쉬며 웃는다) (순분은 쟁반을 가지고 와 그릇들을 놓는다)
최씨:나만 없었으면 오순도순 주고받고 하면서 먹을텐데.
순분:자꾸 그러실거예욧!
최씨:엇! 아냐. 아냐.
순분:(숟가락을 강호에게 주며) 드세요. 아직 아무 것도 먹지 않았잖아요. (앉는다) 식사는 거르지 마세요. 젊다고 한 두끼 어설피 생각하면 늙어서 큰 코 다친다구요.
강호:(얼굴에 화색이 돈다) 알…았어.
순분:(최씨에게 술을 권한다)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죠?
최씨:폐교가 이미 되었어.
순분:아이들은요?
최씨:애들이래봤자, 열다섯명인걸 뭐. 멀지만 읍내로 가는 수밖에. 이미 전학수속이 끝났어. 말이 거창해. 통폐합이라나?
강호:이젠 애들마저 떠나는군요. 야간작업을 하고 녹초가 된 몸을 끌고 돌아올 때면 학교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함성소리가 기운이 나게 했는데. 애들 뛰노는 모습만 봐도 다시 막장에 들어가도 될만큼 힘이 솟구쳤는데. 썰렁해진 운동장을 어떻게 바라보죠.
순분:그게 어제 오늘 일이에요? 이미 익숙해진 일이잖아요.
강호:그래도 학교는 틀리지. 힘들어도 아이들이 뛰며 노는 운동장을 보고 있노라면 내일은 꼭 행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애들을 보면 잠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어.
최씨:그려. 나는 비록 광부지만 탄을 캐며 가난을 먹고살지만 저 애들은 달라. 암, 다르게 키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애들 앞에서는 항상 밝은 얼굴을 했었지.
순분:그나저나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떠나면 새까맣게 잊어버리는게 사람마음인가. 소식 한번없으니….
강호:상…도 말인가?
순분:뭐라구요?
최씨:어어! 왜들 이래?
순분:(벌떡 일어난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강호:그래! 난 바보야! 바보라서 여지껏 누구같이 서울로 가지 못하고 여기 있는거야!
순분:흥! 왜 열내고 그러셔?
강호:바보같이! 바보같이!
순분:뭐라구요?
강호:바보같이! 젊디나 젊은 여자가 뭐 하려고 산골에 처박혀 있어! 못난이 바보같이!
순분:그래요! 나는 바보예요! 바보라서 여기에서 벌어놓은 돈 까먹으며 있는 거예요! (얼굴을 감싸며) 바보라구!
강호:…!
최씨:허 참. 이거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네.
강호:(순분의 손을 잡는다) 미안해. 감정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순분:(뿌리친다) 흥. 눈꼽 만큼도 신경 쓰지 않아요.
최씨:헛허.
강호:아저씨?
최씨:부럽구만. 젊다는 것이, 그려. 그게 재산이야. 그러니 자네들은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거야.
강호:허나….
최씨:허나?
강호:전 혼자서는 시작 못하는구만요.
최씨:응? (사이) 그렇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나지, 암!
순분:흥! 용기도 없으면서!
강호:그래! 이제까지는 용기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구만!
순분:호! 겁나네.
최씨:흣흐.
순분:왜 웃으세요!
최씨:흐흐. 잘 되어가는거야. 암. 흐흐. 옛생각이 절로 나네.
강호:또 젊었을 적 이야기예요?
최씨:지금은 폭삭 늙어버렸지만 그때는 하얀 박꽃 같은 얼굴이었구만.
순분:아주머니가요?
최씨:믿지 않는거야?
순분:아, 아니예요.
최씨:얼굴이 갸름한 계란형이잖아. 전통적인 한국 여인상이지. 처음 만났을 땐 토실토실 했었구만. 웃을 때 양 볼에 패는 보조개는 정말이지 사람 미치게 하였다구.
순분:보조개는 없던데….
강호:(얼른 말을 가로막는다) 그거야 주름살 때문에 가려져서 그러지.
최씨:(눈을 감는다) 아! 역시 과거란 이래서 좋은가봐. 청춘남녀의 사랑싸움을 보며 소외감을 없애라구. 흐흐흐.
순분:또 이상하게 말끝을 돌리시네.
최씨:떽!
순분:…!
강호:…!
최씨:그럼 못써! 이제 서로 솔직해지자구!
순분:네 ?
최씨:당사자들은 아니 ,순분이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둘을 보며 항상 잘되기를 바랐다구.
순분:….
최씨:순분이가 상도와 사귈 때도 우리는 얼마나 서운했다고. 상도는 너무 건들거려. 성실치가 못했어. 얼굴이야 말쑥하지. 하지만 실속이 없어. 그래서 강호와 잘되기를 바랐는데. 결국….
강호:아저씨!
최씨:응?
강호: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그리고 그건…, 순분이의 아픈 상처잖아요.
순분:흥! 죽이 척척 맞으시는군요.
최씨:저런! (사이) 미안해. 하지만 지금 이게 뭐야 !죽네 사네 할 땐 언제고 떠나고 나니 한마디 소식도 없잖아.
순분:기다리지 않구만요.
최씨:천만에. 지금도 기다리고 있잖아. 왜 그럼 강호를 받아들이지 못하지?
순분:뭐라고요 ?
최씨:서로 힘든 생활이잖아. 그리고 순분이도 여길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뭐야. 뭔가 기다리는게 있기 때문아냐?
순분:….
최씨:(순분이의 손을 잡는다) 이봐, 순분이. 강호도 아직 젊어. 그리고 순분이도 젊고. 우리 서로를 의지하며 살면 안될까?
순분:(슬그머니 손을 뺀다)
최씨:난 알아. 아직 상도가 순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걸. 하지만 삼년째 소식이 없잖아. (이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정여인 들어온다)
강호:어? 아주머니 오세요?
정여인:아유! 내가 못살아. 못산다구! 허구한날 곧장 집으로 오질 못하는구만! (최씨에게 달려든다) 이 화상아! 애들 생각도 해야지!
최씨:이 여편네가!
정여인:(강호에게)총각도 속차려. 젊었을 때 한두푼이라도 아껴야지, 술로 날리면 늙어서 이 화상 꼴 된다구.
최씨:으이구! 내 팔자야! 세상의 많고 많은 여자 중에 하필 이런 여편네가 내 여편네가 됐다니!
정여인:날 꾜셔낸게 누군데! 미싱을 밟으면서 야간학교 다니며 여대생이 될 꿈을 꾸고있던 나를 이렇게 만든게 누군데?
최씨:뭐여?
강호:참으세요, 아저씨. 참으세요, 아주머니.
정여인:비켜요! (툭 물러나는 강호) 그래, 이 화상아. 뭐가 어째? 시골에 가면 과수원이 있어? 그러니 힘들게 공장에 다니지 말고 과수원농사나 지으며 독학해서 방송통신대에 가자구?
최씨:내가 그랬던가?
정여인:그러더니 끌고다닌게 노가다판이더니 이 산골에 처박아놨잖아. 당신 안 만났으면 나 대학졸업하고 사모님 됐을 거야, 사모님!
최씨:(정여인을 탁 밀치며) 아이고! 계란형의 전통적인 한국 여인들은 씨가 말랐어. (달아난다) 내 팔자야!
정여인:거기 서지 못해! (나간다) (사이) (침묵하며 두 사람 마주본다)
강호:하하하.
순분:호호호. 강호씨도 그럴거예요?
강호:무얼 ?
순분:여자를 꼬실 때. 최씨 아저씨처럼 그러실거냐구요
강호:아니. 절대로 난 안그래.
순분:어떻게 믿어요. 남자들이 다 그런다는데.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그렇게 해서 어떻게라도 여자를 차지하려고.
강호:스톱!
순분:…!
강호:난 틀려. 그리고 난 나를 잘 아는 여자에게 결혼신청 할거야.
순분:그…래요오?
강호:(다가선다) 순분!
순분:(물러선다) 왜, 그러세요?
강호:(와락 손을 잡는다) 같이 떠나자. 어딜 가더래도 순분일 고생시킬까.
순분:아이-, (사이) 어딜간다고 해서 편히 사십시오하고 누가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강호:(가슴을 치며) 튼튼한 이 몸이 있잖아.
순분:아이-몸이 재산인데 무리하면 안되잖아요.
강호:순분이를 고생시키지 않을테야. 자신 있어.
순분:같이.
강호:응?
순분:나도 해요. 당신과 같이. 사실 난 무척 당신을 기다렸어요. 상도씨보다 먼저 당신이 내 눈에 들어왔었는데….
강호:그만! 그 이야기는 그만!
순분: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남자들 많이 겪었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여느 남자완 틀렸어요. 뭐라할까? (사이) 응? 때묻지 않은 철부지!
강호:뭐야 ?
순분:(뒷걸음질치며) 호호.
강호:거기 못 서!
순분:잡아 보세요.
(두어바쿼 춤추듯 돌다가 순분이 커튼 속으로 들어간다)
강호(소리):잡았다! 다시 한번 말해봐! 뭐라고 했지?
순분(소리):아녜요. 아네요.
강호(소리):어?
순분(소리):몰라, 잉.
(사이) (순분의 손을 잡고 나오는 강호)
강호:사랑해.
순분:(고개를 숙이고) 그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어요? 바보같이…!
강호:(꼬옥 안는다) 이제부턴 바보안해!
순분:(말없이 꼬옥 안는다) (사이)
강호:이제 졸립군. 아-함. 지금부터 잔다 해도 서너시간 밖에 못 자겠어.
순분:그렇군요. 피곤해서 어떡허죠.
강호:괜찮어, 난 오늘 같은 날은 두 배로 일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아-함. 졸립군. 저기서 잘까?
순분:안돼욧!
강호:으잉! 누가 뭐랄까. 이제부터 우린 공인된 사인데.
순분:그래도 안돼욧! 정식으로 인가 받기 전에는!
강호:흐흐. 그려. 공식적으로 인가받기 전에는…
순분:(민다) 빨리 가세요.
강호:흐흐. 빨리 가라해도 싫지는 않구만.
순분:자꾸 그러실거예욧!
(강호, 재빨리 키스한다)
순분:어맛! 이 늑대!
강호:하핫! (재빨리 키스한다)
순분:(한참 문을 바라본다) 아! (가슴을 부여안으며) 그리도 까치가 울어대드니…
(노래를 부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화절령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화절령 고개에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순분의 노래 두어번 반복된 뒤 정적) (사이)
최씨(소리):아니? 자네는?
상도(소리):핫하! 최씨아저씨! 저 상도입니다. 여전하시군요.
순분:(굳어지며 귀를 기울인다) 아니? (문 가까이로 간다)
상도(소리):모두 잘 계십니까? 강호는 지금도 있습니까?
최씨(소리):그런데 자넨 웬일인가? 성공했나 보구만. 훤해졌어?

<12명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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