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자신감이 필요한 한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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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세계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섰는데 우리 경제만 오리걸음을 하고 있다. 소비와 투자가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수출만으로 성장을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다. 수출은 해외 경기 덕분이라 치고 내수 시장이 얼어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세금을 깎고 금리를 내려줘도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는다면 가격 요인 보다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소비의 경우 가계부채 탓을 하지만 빚이 많다고 무조건 씀씀이를 줄이는 것은 아니다. 이자와 원금 갚아 나갈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소비 수준을 급격히 변동시키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자의 행태다. 그런데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정도로 시장의 불안감이 큰 것이다. 투자와 생산활동이 왕성하면 금리가 다소 올라도 소득 향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봉급생활자의 소비가 늘 수 있다. 자영업자들의 사업도 나아질 것이고 금리생활자들도 한시름 놓을 것이다. 결국 소비 진작을 위해서는 기업 투자 활성화가 급선무다.

기업들이 불안해 하는 원인은 좀더 복잡하다. 불편한 노사관계나 정치 불안 및 부패가 기업들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문제는 위기 이후 정경유착의 고리가 흔들리며 기업들이 비정상적으로 돈을 벌 기회가 줄었다는 데 있다. 생산성 향상 등 정상적인 수익 창출 능력은 답보상태인데 경제외적 비용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힘든 것이다.

나아가 시장개방의 여파로 기업 활동에 따른 위험은 증가했는데 이를 흡수해 줄 장치는 약화됐다. 적당히 봐주던 은행도 사라졌고 계열사 간의 내부거래에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과거처럼 차입경영에 의존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안정적인 투자재원을 조달할 만큼 주식시장이 성숙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옛날의 사업 방식을 대체할 대안을 찾지 못한 엉거주춤한 상태인 것이다.

정부라도 나서 중심을 잡아주면 좋을 텐데 공적자금을 다 쓴 이후 금융개혁과 기업투자 촉진을 위한 이렇다 할 정책 이니셔티브가 없다. 신용카드사 처리에서 보았듯이 정부 역시 과거의 방식에 어정쩡하게 매달려 있는 형편이다. 다른 정책 분야에서도 우선순위와 일관성 없는 정책 집행으로 정부가 시장의 불확실성을 오히려 키운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 경제를 바로 세우려면 발상의 전환과 효과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몇 가지만 제안하자. 우선 검찰은 이번 기회에 정치 비자금을 최대한 파헤쳐야 한다. 비자금 수사 때문에 경제가 위축된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다. 정치인에게 돈을 줘봤자 실속 없이 피해만 본다는 인식이 굳어야 기업도 살고 경제도 산다. 이와 함께 공정위와 금감위는 기업개혁과 금융개혁의 확실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부분적인 개선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제도 개혁의 비전을 보여야 시장의 신뢰를 얻는다.

정책의 차원에서 특히 창의성이 필요한 부분은 재정과 통상이다. 기업 혁신의 유인을 제공하고, 외부충격을 흡수해 거시 환경을 안정시키며, 적절한 복지정책으로 사회 안정을 이루는 일을 정부 재정의 한 틀에서 이루려면 큰 폭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노동과 교육 같은 인적자원 정책도 재정과 연계해야 한다. 개방 정책은 말보다 전략이 앞서야 한다. 경제특구와 자유무역협정은 더도 말고 하나씩만 제대로 해보자. 제조업의 해외진출은 곧 산업공동화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이를 시장 선점, 무역수지 개선, 기술 혁신의 기회로 삼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국내 투자환경이 개선되면 누가 나가든 개의할 바 없고 외국기업이 안 온다고 안달할 이유도 없다.

끝으로, 힘 있는 경제팀을 보았으면 한다. 현 정부 들어 권력의 힘을 스스로 자제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밖으로 여론을 이끌고 안으로 관료를 움직이는 비전과 리더십을 기대한다. 정부부터 자신감을 보여야 기업가와 소비자도 힘을 얻을 것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