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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문화재 돌려 받자

중앙일보

입력

뉴스위크“역시 돈의 힘이군.” 조하현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의 말이다. 3월 7일자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에 실린 외규장각 도서 반환 촉구 광고를 본 소감이다. 이 광고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을 펼치는 한국의 문화연대와 재불 변호사 김재중씨가 9000만원을 들여 실었다.

광고에는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되지 않으면 우리 한국인들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간절한 호소가 담겼다. 조 교수는 2000년 11월 같은 취지의 기고문을 르몽드지에 보냈었다. 그는 기고문에서 “외규장각 도서는 한국의 찬란한 역사를 상징하는 주요한 문화재로서 당연히 한국 국민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당시 그 기고문은 실리지 않았고 이후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6년이 지나 비록 광고 형식이지만 한국의 주장이 프랑스 대중매체에 전해진 셈이다. “돈을 받고 실어주는 광고지만 프랑스 신문이 외규장각 반환 주장에 지면을 할애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라고 조 교수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르몽드 광고에 이어 프랑스 최대 민영방송 ‘테 에프 앵’은 1866년 외규장각 약탈에서부터 1993년 이후 한국-프랑스 간 반환 협상 경과, 이와 관련한 한국민들의 정서 등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이 방송은 “한국인들은 프랑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상기시킨다”고 전했다.

외규장각 도서처럼 해외에 유출된 한국 문화재는 7만5311점(문화재청 2006년도 국정감사자료)이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일본(3만4369점)에 있다. 이어 미국(1만7803점), 영국(6610점), 독일(5221점), 프랑스(2121점), 중국(1434점), 캐나다(1080점) 등 총 20개국이 절반 가량을 소장했다. 현지 기록과 언론 보도, 국내 기관 조사 등을 통해 확인된 문화재를 그냥 합산해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최민수 전문위원은 “정밀조사를 통한 정확한 자료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실제로 유출된 문화재는 이보다 많으리라고 추정된다. 전문가에 따라서는 그 규모를 수십만 점에서 수백만 점까지 달라진다. “개인소장품까지 합하면 해외에 있는 문화재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난다”고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밝혔다.

해방 이후 한국은 일본·미국·프랑스 등 총 8개국으로부터 29회에 걸쳐 4874점의 문화재를 돌려받았다. 정부 간 협상으로 1660점을 돌려받았고, 외국의 민간이나 정부 기증 2881점, 국·공립 박물관이 구입한 경우가 332점, 민간 구입기증 1점(지난해 7월 문화방송이 구입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김시민 장군 공신 교서) 등이다.

그동안 정부 간 협상에 따른 반환은 모두 네 번에 불과하다. 1965년 한·일 간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전후로 1432점을 두 번 나누어 돌려받았고, 1991년 영친왕비 복식 등 양도에 관한 협정으로 227점이, 2005년 북관대첩비가 반환됐다. 수량에서는 전체 환수 문화재의 3분의 1이지만, 횟수나 노력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관계자들은 평한다.

따라서 정부는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예정된 ‘해외 우리 문화재 조사 10개년 계획’을 세워 정확한 해외 유출 한국 문화재 현황을 파악 중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외 박물관, 미술관 중에서 한국실 혹은 한국 코너를 운영 중인 소장처를 대상으로 현지 조사를 진행한다. 그 결과 일본·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 36개 소장처에 산재한 한국 문화재 8971점을 직접 확인했다. 그동안 15책(목록집 4종/도록집 8종)이 만들어졌다. 사실 해외문화재를 분류해 목록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1984년부터 시작됐다.

그러다 2002년부터 현지조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연간 5억원이 채 안 되는 예산으로는 전문가들 동원해 1년에 두세 번 해외 출장을 할 뿐이다. 박대남 학예연구관에 따르면 해외문화재 7만5000여 점 중에 주소지가 확인된 경우가 절반이고, 그중 다시 50%쯤의 도록화가 2011년까지 완성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보다 더 철저한 도록화에는 인력과 예산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얘기다.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는 상당수 유통경로가 불분명하다는 특징이 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등 사회 혼란기를 틈타 유출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법 문화재 반환의 근거가 될 유출 경로나 소유자 변동의 경위 파악이 쉽지 않다. 또 현재 소장하는 기관에서도 입수 경로나 출처를 밝히길 꺼린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5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다.

이곳에 소장된 도자기 등 한국 문화재 500여 점의 입수 경위를 묻자 박물관 측은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반환 분쟁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현지 조사에서는 유물의 연대와 크기, 색상 등 외형적 특징과 소장기관이 공개한 구입처만 조사 보고서에 기록하고 만다. 유출 경로를 탐문하다가는 이들 국가나 박물관이 소장한 미공개 한국 문화재는 아예 구경조차 못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해외 문화재 중 불법유출됐다고 단정할 만한 사례는 외규장각 도서 등 극히 일부다. 그나마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가 자국 문헌에 전리품이라고 기록해 그 불법성이 드러난 경우다. “부동산도 등기부 등본이 있어야 소유권을 확인하는데 문화재와 같은 동산은 등기부도 없지 않으냐”고 문화재청 문화재교류과 이종희 사무관은 고충을 털어놓았다.

설사 불법유출된 문화재라도 우리 정부가 반환을 강제할 수단은 마땅치 않다. 불법반출 문화재 관련 국제협약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화재의 불법반출이나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이다. 1970년 11월 16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이 협약은 “협약 당사국이 협약상의 규정에 위반해 문화재를 반입, 반출 또는 소유권을 양도함은 불법”(3조)이라고 규정한다.

이 협약은 가입국의 박물관 등이 불법반출된 문화재를 취득하지 못하게 했다. 현재 112개국이 가입했으며 일본·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중국·덴마크 ·캐나다 등 한국 문화재를 다수 보유한 국가 대부분이 가입했다. 하지만 이 협약엔 맹점이 있다. 협약 체결(1970년) 이전에 유출된 불법 문화재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해외 문화재는 대부분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전후 유출됐기 때문에 이 협약으로 실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 1995년 체결된 ‘도난 또는 불법반출된 문화재의 국제적 반환에 관한 협약’(유니드로와 협약)은 문화재를 도난당한 때로부터 50년 이내 반환청구 소송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었다. 이 또한 한국엔 대부분의 경우 그림의 떡이다. 또 한국 문화재를 다량으로 보유한 국가 중 이 협약에 가입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결국 정부는 “소장국가가 반환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한 정부 간 협상으로 문화재를 반환받기가 사실상 어렵다”고 말한다.

이 때문인지 정부가 현재 추진 중인 외규장각 도서 반환도 1992년 공식협상이 개시된 이래 15년이 지나도록 타결의 실마리를 못 찾았고 김재중 변호사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소송을 파리 행정법원에 제기했다.

시민단체와 학계 일각에서는 정부에 불만이 많다. 국제법의 한계만 과도하게 의식할 뿐, 정작 반환에 유리한 국제 조약·규칙의 발굴과 활용에는 소극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령지의 군대 약탈과 문화재 훼손을 금지한 1907년 헤이그 조약의 부속 규칙은 잘만 활용하면 문화재 반환의 지렛대가 된다고 연세대 조하현 교수는 주장했다. “약탈 문화재는 법이 있어 돌려받는 게 아니라 도둑질 행위 자체가 잘못됐기에 돌려받는다. 정부가 이런 신념과 원칙에 입각한다면 국제법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

또 정부가 외국의 문화재 반환 사례를 더 치밀하게 수집, 분석해 대응 논리를 개발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외규장각 도서를 놓고 우리와 갈등을 빚는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승리 후 1870~71년 당시 약탈당한 문화재를 독일에서 되돌려받은 일이 있다.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콩고는 벨기에가 약탈문화재를 반환하지 않자 유엔 총회 등 국제무대에서 부당성을 지속적으로 규탄했다. 국제여론이 부담스러웠던 벨기에는 문화재 반환은 물론 재정, 기술적 지원까지 콩고에 제공했다.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의 황평우 위원장은 “외교통상부나 문화재청이나 한국에 불리한 국제협약의 논리를 극복하기보다는 틀 속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정부의 태도를 탓했다. 문화재위원인 김정동 목원대 교수도 “강대국 논리에 따라 만들어진 국제협약은 피약탈국의 문화재 환수를 영영 불가능하게 한다”며 다각적인 반환 노력이 뒷받침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시민단체나 학계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반응이다.

문화재를 돌려받지도 못하면서 분란을 일으켜 외교 관계만 악화시키는 무리수를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아가 문화재청은 현실적으로 반환이 어렵다면 현지에서의 전시 활성화를 유도해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리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주장했다.

민간단체는 문화재 반환을 우선시하지만 정부는 여타 국익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국제사회가 약탈 문화재 반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김귀배 문화팀장은 “비록 소규모지만 국제사회에서 정부 차원의 반환이 증가하며, 민간 차원의 반환 노력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단계에 있다”고 전했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시점을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들이 놓치지 않고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박성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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