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로펌 '쩨쩨한 블로그' 가 내뱉는 속물주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익명의 변호사

제레미 블라크만 지음

황문주 옮김, 두드림

364쪽, 1만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본능을 갖고 있나보다. 미국 거대 법률회사 인사담당 파트너인 '익명의 변호사'가 어느 날 블로그를 개설한다. 물론 모든 인물은 익명이나 별명으로 칭한다. 들통나는 순간 회사에서 잘릴 테니까.

나름대로 높은 자리에 있는 '익명의 변호사'인데도 쩨쩨하기 짝이 없다. 맨 처음에 올린 글이 "내 사탕 좀 그만 훔쳐가!"라니, 알만하지 않은가. 물을 많이 마시는 직원은 찍히기 십상이란다. 화장실에 들락거리느라 일하는 시간을 깎아먹기 때문이다. 회사 몰래 땡땡이치려고 겉옷이나 장갑을 사무실에 걸쳐놓고 밖에 나갔다가 동상에 걸린 변호사에겐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나.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저녁 식사를 해야한다고 일찍 나가는 직원도 이해할 수 없단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아내가 떠난다면 "그런 여자와는 헤어지는 게 낫다"나.

그는 신임 사장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머저리'의 사무실로 몰래 들어가 크기를 재어보고는 "내 사무실이 약 2제곱미터 더 넓었다. 내가 그만큼 더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며 기뻐한다. 실은 하버드 넥타이.펜.반지만 착용하며 '하버드 출신'임을 자랑하는 '머저리'와 비교해 그가 내세울 게 그뿐이라서지만. 그럼에도 그는 피 튀기는 승진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애쓴다.

회사의 정치 게임 따위에 끼어들기 싫어서라도 로펌이 아닌 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는 '익명의 조카'에게 '익명의 변호사'는 말한다.

"노숙자 쉼터에는 정치가 없을 것 같니?"

소설은 직원을 최대한 부려먹으려는 회사와 고위관리자의 생리, 학벌주의와 물질만능주의 등 각종 속물주의를 풍자한다. 반대로 재미있는 처세서로도 읽힐 듯하다.

작가 지망생이던 지은이는 처음엔 돈을 벌기 위해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로펌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블로그 '익명의 변호사(anonymouslawyer.blogspot.com)'를 개설해 유명인사가 되는 바람에 이렇게 작가의 꿈을 이뤘다.

이참에 '익명의 OOO' 블로그나 개설하는 건 어떨까. 단, 회사에 들키면 끝장이다.

이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