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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산에 간 선비, 그 앞에 펼쳐진 정신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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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산문기행-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심경호 지음, 이가서, 784쪽, 2만9800원

이황.정약용.허균 등 조선 선비 54명이 산을 유람한 뒤 그 소회를 기록한 유산기(遊山記)를 엮은 책이다. 백두산.금강산.지리산 등 35곳의 산이 소개된다. 한자 원문을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가 매끄럽게 번역하고 해설도 달았다. 또 글에 어울리는 산수화와 지도 70여점도 함께 수록했다.

"높은 곳에 올라 '중용'에서 말한 '멀리 가는 것은 반드시 가까이에서 시작하고 높이 오르는 것은 반드시 낮은 데서 시작한다'는 의미를 알게 되고, 한편으로는 중도에 쓰러지고마는 나약함에서 떨쳐 일어나고, 한편으로는 한 과정을 마친 뒤에 완성하게 된다는 학문을 분발하게 된다. 이것이 어찌 기이한 구경거리만 찾고 멋진 경승만 고르는 일에 그치겠는가?"(이원 '금강산 유람록')

이처럼 산은 선비들에게 구경거리 이상의, 깨달음의 장소였다. 또 "아아, 내가 일찍이 저 조각구름 아래 있을 때는 어둑하면 온 천하가 어둡다고 생각하고 밝으면 천하가 다 밝다고 생각하였으며, 한 단계 올라가면 더 높은 곳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한 단계 내려가면 더 낮은 곳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을 회상하니 참 우습다"(김윤식 '윤필암에서 멀리 조망한 기록')에서 보듯 자기 성찰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 뿐이랴. 선비들에게 산은 가슴 속의 티끌을 씻어내는 휴식과 풍류의 공간이었고, 백성을 돌아보고 임금을 그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유산기에는 인생.철학.예술이 녹아있다.

당시의 산행 문화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폭포 아래 반들반들 매끄러운 바위 위에서 '물미끄럼 타기'을 즐겼고(남효온 '금강산 유람기'), 계곡에선 앞다퉈 문석(文石.무늬있는 수석)을 줍는가 하면(허훈 '수정사 유람기'), 중간에 날이 저물면 '바위에 의지해 나무를 걸치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후 앉아서 한참을 자는' 노숙을 하기도 했다(최익현 '한라산 유람기').

사전 준비도 철저했다. 서명응의 '백두산 유람기'에서는 산에 오르기 전 여러 날 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큰 소리로 떠들지 않으며 심부름꾼까지도 부정한 일을 못하게 했다는 구절을 볼 수 있다. 또 사대부 여성 김금원의 '호동서락기'에는 산수유람을 위해 남장을 하고 행장을 꾸리는 열네살 소녀의 모습이 나온다.

몸이 불편해 직접 산에 오르지 못할 때도 산을 즐길 방법은 있었다. 서재에 산수화를 걸어두고 마음을 달래는 '와유(臥遊.누워서 즐김)'를 했다(강세황 '산향기').

책 말미엔 선인들의 산행 준비와 등산 방법, 유람록의 작성 요령 등을 따로 부록으로 적어뒀다. 선비들이 사용했던 교통수단과 옷차림.비상식량.숙박시설 등을 꼼꼼히 되짚어 보노라면, 약동하는 자연 속에서 천하를 논하고 풍류를 즐겼던 그들의 정신세계가 더욱 부러워진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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